[중국사] 명대 황제권의 양윤:내각과 환관
- 최초 등록일
- 2005.06.10
- 최종 저작일
- 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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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내각제도의 발전.
(1)내각제도의 성립
(2)내각의 정비
(3)수보제(首輔制)의 출현
2. 환관의 정치개입
1) 환관의 세력강화
2)환관의 전횡
3. 수보 장거정 의 전권정치
1)장거정의 대외 대내 정책
본문내용
1. 내각제도의 발전
(1)내각제도의 성립
①태조-중서성을 폐지한 후 모든 정무를 총람하게 된 황제를 보좌하도록 홍무 15년 전각 대학사(殿閣大學士)를 설치.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비서기구일 뿐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5품을 넘지 않도록 함.
②성조(영락제)- 영락제 자신이 남경의 사정에 어둡고 정국을 수습할 강력한 보필기관의 필 요성을 절감, 즉위하자 해진(解縉), 양영(楊榮), 양사기(楊士寄), 호광(胡廣) 등 7인을 문연각(文淵閣)에 입직시켜 기무(機務)에 참여케 함.
영락 14년에 이들에게 전각대학사를 가수(加授)하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명조의 내각제도가 출현하게 됨. 그러나 이들 지위는 정5품을 넘지 않도록 하여 임무는 중요하면서도 질은 낮게 하여 권신의 출현을 방지.
이 시기 내각은 제사(諸事)에 전제(專制)할 힘이 없는 황제의 사적인 고문 의 성격이었으나 이후 황제권력을 배경으로 환관과 서로 각축하면서 그 위 권을 강화해 나가 실질적으로 관료제도의 정점에 위치하게 됨. 또한 이 시 기 내각의 각신은 황자, 황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황태자 보도(補導)를 위해 동궁(東宮)의 관을 겸하여 내각의 지위가 높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
③인종, 선종- 내각의 위권이 더욱 높아지는 시기로 5품관을 넘지 않도록 한 원칙이 깨짐, 이후 내각대학사는 육부의 상서, 시랑과 대등한 교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