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현대사회] 절두산 성지 답사문
- 최초 등록일
- 2004.09.25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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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이 봉우리가 원래부터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이라고 해서 가을두, 산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다고 해서 잠두(蠶頭) 혹은 용의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용두(龍頭)라고 불리던 이 봉우리는 예전엔 풍류객들이 그늘을 찾아 산수를 즐기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이 곳은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인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유명했던 장소로 양화진은 용산 쪽 노들나루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풍경이 밤섬을 돌아 누에 머리처럼 우뚝 솟은 이곳 절벽에 와 닿고, 이어 곧 마포 나루를 향해 내려가던 곳으로 ‘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늘어진 곳’이었다.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경치로 많은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으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진다. 이곳 잠두봉 명승지와 양화나루는 1997년<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전경> 사적지 제 399호로 지정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병인박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역사적 사건. 그 당시에는 그저 사실을 외우기에 급급했을 뿐, 병인박해를 깊게 생각하고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직접 현장을 찾고 둘러보며 그 잔인한 실상을 자세히 알고 난 뒤에 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그치기 어려웠다. 천주교인들은 효수형 뿐 아니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기도 했으며 몽둥이로 쳐 죽이는 장살, 얼굴에 한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白紙死) 등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형벌을 통해 계속해서 순교자들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도 천주교 신자로 간주되어 희생양이 되었으나 신자들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절대적 믿음은 주위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었으며, 따라서 아무리 박해를 계속해도 신앙은 절대 줄어들지 않고 더욱 더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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