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A+ 초기 광주 비엔날레- 전시 준비 인력의 변화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광주 비엔날레
1) 광주 비엔날레의 역사
2) 의의
2. 광주 비엔날레 조직 특성
1) 지방정부 관료집단
2) 재단법인
3. 전시 준비 인력의 변화
1) 제1, 2회: 전시기획실장, 커미셔너
2) 제3회: 총감독제
3) 제4회: 큐레이터의 등장
4) 제7회
5) 이후
4. 전시 인력이 초기 비엔날레에 미친 영향
1) 제1회 광주비엔날레
2) 제2회 광주 비엔날레
5.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비엔날레란 2년에 한 번이라는 공식적 시차를 가지고 예술가, 평론가,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등이 한 장소에 모여 동시대의 미술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작품들을 확인하고 담론 형성의 기회를 만드는 현대미술 이벤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광주 비엔날레는 1995년 시작 이후 오늘까지도 핵심적인 비엔날레로 자리 잡아 국내외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광주 비엔날레도 자리를 잡기까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특히 조직·인력 문제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지역에서 권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공무원과 예술가의 업무 처리 방식 차이 등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고, 외국인 유명 예술 인사를 초청하는 과정에도 의견이 잇따랐다. 본 연구에서는 조직, 인력 문제, 특히 비엔날레를 총괄하는 인력에 따라 전시가 어떤 양상을 띠고 초기 비엔날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2. 광주 비엔날레
1) 광주 비엔날레의 역사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시작은 국내외의 세계화 이슈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11월 세계화, 지방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냉전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자본주의 체제하에 세계 질서가 재편되고 있었다. 세계는 무역장벽을 없애려는 미국 중심의 구도로 변모하고 있었고, 개방화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미술계도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바람이 불었다. 여기에 1993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이 유치되었고, 1995년은 베니스비엔날레가 100년을 맞으며 마지막 국가관으로 한국관을 개관했다. 이러한 흐름 속 한국에도 국제 비엔날레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광주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당시 취임한 광주 시장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립과정에 고무되어 비엔날레를 구상했다. 이후 그의 예산지원 요청에 김영삼 대통령이 응답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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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 결과보고서, 1995.
광주비엔날레 발전 계획기본안,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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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619*************07 (2022년 12월 22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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