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과 성장
- 최초 등록일
- 2023.02.27
- 최종 저작일
- 2005.08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과 성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독교의 수용 -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Ⅲ. 기독교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Ⅳ.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적 의미
V. 한국의 교회 성장과 그 요인
VI. 맺는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기독교는 19세기 말엽 서세동점의 역사와 더불어서 한국에 전파되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여 년이 된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복음전도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고 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국 선교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유례없는 성장' 이라고 지적해 왔다. 이러한 기독교가 특히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고 또 단시일 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관서 지방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그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기독교의 민족사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 성장의 요인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기독교의 수용 -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자가 있었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알렌으로 그는 1884년 9월에 이 땅에 들어왔고, 다음해인 1885년 4월에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목사, 또 그해 5월에는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목사가 들어왔다. 이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장사하러 만주에 갔던 의주 청년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익세 5명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목사 맥킨타이어를 만나 알렌이 한국에 들어오기 8년 전인 1876년에 세례를 받았고, 또 의주 청년 서상윤도 1879년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목사 로스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던 이수정도 1883년 4월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신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가장 열렬하고 적극적이었던 곳은 관서 지방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목사가 관서지방을 몇 차례 답사를 하고 본격적인 선교 사업을 벌인 것은 1892년 부터였다.
장로교회의 통계에서 보면 1885년부터 1910년까지의 교회 설립 수가 평북이 98, 평남이 162, 황해도가 102개소로서 전체 교회 683개소 중에서 관서 지방이 362개소로 과반수를 넘고 있다. 구한국 학부에서 조사한 전국학교수를 보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교회가 많이 세워지고 또 발전하였기 때문에 그 토대 위에서 학교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면, 관서 지방은 어떻게 해서 개신교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적극적이고 또 단시일 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참고 자료
김광린, 〈개화기 관서지방과 개신교 개신교 수용의 일사례〉 《한국개화사상사연구》, 일조각
이만열, 1991, 〈기독교의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노치준, 1994, 〈한말의 근대화와 기독교〉 《역사비평》 27, 역사비평사
이만열, 1993, 〈한국 교회성장과 그 요인에 관한 일고찰〉 《숙대사론》 1, 숙명여대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