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의의와 전개과정 및 실패와 한계점 비교
- 최초 등록일
- 2022.12.04
- 최종 저작일
- 2022.12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I. 임오군란
1. 사회적 배경 및 원인
2. 임오군란의 전개 과정
3. 임오군란의 결과
II. 갑신정변
1. 사회적 배경 및 갑신정변의 원인
2. 갑신정변의 과정
3. 갑신정변의 결과
4.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III.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비교
1. 공통점
2. 차이점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사회적 배경 및 원인
1873년 탄핵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지위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점점 증가하는 서구열강의 위협으로 백성들의 민심은 아직 쇄국에 머물러 있었고 흥선대원군 역시 최익현 등 척화파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아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계 문제가 대두돼 다시금 척화파들이 여론을 등에 업으려 하였으나, 운요호 사건과 이에 이은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며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결국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척화파는 관직에서 밀려나고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민씨 정권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자기 정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기들의 척족들과 개화파 관료들을 대거 기용하는 한편,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한다. 1882년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융 5영을 무위영,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면서 대량 해고 시키고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민씨 척족들의 사병과 다름없는 별기군과 달리 차별했다.
훈련도감 출신 구식 군인들은 당시 일본군을 모델로 신설된 별기군을 ‘왜별기’(倭別技)라 낮춰 부르며 증오했는데 특히 봉급 연체를 초래한 정부 재정 위기의 원인이 민씨들의 탐욕에 있다고 생각했다.
2. 임오군란의 전개 과정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참고 자료
김영작, 『김옥균 - 시대를 앞질러간 개혁의지』, 한국사 시민강좌, 2002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연구』, 지식산업사, 2000
한철호, 『개화일제강점기 김옥균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사와 담론, 2004
김진성,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조·청 관계와 변법개화파의 대청(對淸) 인식』, 2011
박은숙, 『개항기(1876~1894) 군사정책 변동과 하급군인의 존재양태』, 1993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4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국근현대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