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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2. 궁예의 출생과 생애
3. 미륵정토를 꿈꾸다
4. 태봉(후고구려)의 건국
5. 왕건의 정변과 최후
6. 궁예에 대한 평가
7. 참고문헌
본문내용
1. 개요
궁예는 후삼국시대의 군웅이자 후백제의 견훤과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후고구려, 이후 마진, 태봉으로 이어지는 나라의 국왕이자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한 승려 출신의 군주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가 됐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였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궁예 정권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개 떠돌이 승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무력적 소양과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만을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불려 당시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평정하는 등 엄청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재위 말년에 가혹한 폭정을 실시했는데, 각종 전쟁과 정치를 시행하면서 편집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병이 발병하였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이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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