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이재수의 난' 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21.08.16
- 최종 저작일
-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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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 '이재수의 난' 보고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과제 참고용으로 추천드립니다.
목차
1. 19세기 조선 사회
(1) 조선의 개항
(2) 제주도의 상황
2. 이재수의 난의 원인 - 봉세관의 권력과 천주교의 결합 -
3. 제주 지역민과 천주교의 갈등
(1) 천주교의 권력
(2) 횡포와 갈등
(3) 이재수의 난
4. 이재수의 난, 그 의미
(1) 공존하기 위한 노력
(2) 변화의 과정
(3) 공존의 역사
5. 결론과 시사점
(1) 문화충돌, 과정의 중요성
(2) 다문화 사회 속 공존과 발전
(3) 지역사회의 역할
6. <참고자료>
본문내용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천주교도들과 제주 민중들과의 충돌사건은 우선 그 규모에 있어서 7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점과 그 사건이 조선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근세사의 엄청난 비극이었다. 특별히 1901년의 이 제주민란은 시기적으로 보아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이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고조시켜준다. 이 사건의 명칭은 ‘이재수의 난’, ‘신축년 제주민란’, ‘신축교난’, ‘제주교난’ 등으로 사용되는데 특히 후자의 두 명칭인 ‘신축교난’과 ‘제주교난’은 천주교 측에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주제에 맞게 이재수의 난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1) 조선의 개항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조선은 밀려오는 제국주의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마침내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쇄국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일본과 개항하게 되었다. 이어서 걷잡을 수 없이 구미 제국들이 조선에 진출하게 되는데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에는 한영ㆍ한독조약이, 1884년에는 이탈리아와 러시아가 조약을 체결하고 그 후 1886년에 한불조약이 체결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동안 박해해오던 천주교를 묵인하기 시작했다. 제 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Ridel) 주교가 1877년 조선에 입국해서 숨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그 이전과는 달리 사형 대신 중국으로 추방되었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중대한 정책 변화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어 1884년 제7대 조선교구장으로 블랑(Blanc) 주교가 취임해서 한한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더욱 확대해 갔다. 그러다가 1886년의 한불조약에서는 신교의 자유를 암시하는 “교회”라는 문귀를 삽입시켜서 천주교의 선교를 문서로써 공인받게 되었다.
참고 자료
이기석(2011), 1901년 제주민란 이야기, 스토리앤이미지텔링연구소
김선필(2020), 종교와 지역 사회의 공존 -20세기 전반 천주교 선교사들의 제주문화인식을 중심으로-, 한국종교학회
고민희(2019), 제주 기독교의 선교 양태에 관한 비교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