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백범 김구의 삶
- 최초 등록일
- 2021.06.03
- 최종 저작일
-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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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백범 김구의 삶"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 백범일지에 대한 요약
Ⅱ. 백범 김구의 주요활동과 그에담긴 역사관
1. 백범 김구의 주요 활동
2. 역사관
Ⅲ. 맺는 말 – 필자의 견해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 백범일지에 대한 요약
백범일지는 상권, 하권 그리고 나의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상권은 유서 대용으로 두 아들에게 백범이 지낸 일을 알리기 위해 쓰여졌고, 하권은 해외에 있는 동포들에게 민족운동에 대한 경륜과 소회를 전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김구는 조선이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1876년에 태어났다. 백범이 성장하던 유년 시절은 조미 수호 조약이 조인되고, 대원군의 집권이 시작되었으며, 일본에 신사 유람단이 파견되는 등 개화의 움직임과 보수적 압력이 서로 교차되는 격동기였다. 김구는 과거 급제를 목표로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매점매석의 폐해를 깨닫고 과거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반체제 성향을 가지게 된 김구는 동학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능동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백범은 치하포의 객줏집에서 변복을 한 일본인 ‘쓰치다’를 마주치게 되는데, 을미사변의 배후라고 의심하여 살해한다. 이 결과로 백범은 감옥에 투옥되어 장기 수감생활을 보내게 된다.
출옥이 불가능할 것을 예측하고 백범은 1898년 탈출을 감행한다. 수감생활을 할 때 접했던 개화사상의 서적 덕분에 나라를 구하기 위한 길은 근대적 지식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한 백범은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자유주의적 종교관과 사상을 바탕으로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위한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며, 일본 군경에 대치한 격렬한 시위운동에 일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백범은 교육사업에 주력하기로 결심한다.
1907년 백범은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게 된다. 민주 공화제 체제를 공식목표로 하여 조선의 독립을 지향하는 신민회에서, 황해도 총감을 맡은 김구는 신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황해도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신교육, 신문화 보급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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