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경제사 '조선과 일본의 무역_조선후기 개시무역을 중심으로' 레포트(8장)입니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조선 후기 왜관정책
2) 개시와 조시
3) 조일 무역의 장소
4) 조일 무역의 주체
5) 조일 무역의 종류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국과 일본은 고대사회부터 오랜 시간 교류를 해왔으며, 이는 조선시대 또한 변함이 없었다.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사대국가 간 교린(交隣)외교를 펼치고 있었으나, 대마도와의 관계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아니라, 조선이 대국의 입장에 선 조공책봉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란 이전에는 계해약조(1443, 세종 25)에 의해 삼포와 서울에 왜관을 설치하여 4곳에서 일본인의 숙박과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으나, 왜란 이후 체결된 기유약조(1609, 광해 1년)에는 부산포를 제외한 모든 왜관이 폐쇄되었다. 왜란 이후, 일본의 사절이 한양으로 상경할 수 없는 독특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산의 왜관은 조선초기의 서울에 존재하던 왜관의 정치적 기능이 이관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관에서 숙박하는 왜인들의 무역 또한 이루어졌기에 정치적·경제적 기능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조선과 일본의 무역이 중단되는 강화도조약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Ⅱ. 본론
1. 조선의 왜관 정책
왜란 이전 조선에 방문한 일본의 사절은 제포·부산포·염포의 3포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조선 국왕을 알현하고 일본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왜란 이후, 서울에 있는 동평관은 폐쇄(1609, 사실상 왜란 발발 직후 폐지)되어, 외교는 서울에서, 무역을 3포에서 해결했던 기존의 이원적 무역방식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왜란 이후 체결된 기유약조에서, 조선은 삼포 중 오직 부산포만 일본에 개항할 것을 명시하며, 조일관계는 부산포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부산에서 대일 무역 및 외교의 모든 업무가 이루어졌기에, 부산에 존재하는 왜관에는 일본인 사절과 일본 상인에 대한 숙박 시설뿐만 아니라, 의례용 건물, 조선 관리의 관청와 같은 다양한 건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부산에 존재했던 왜관은 조선후기 280년간 절영도, 두모포, 초량 순으로 왜관을 옮기게 된다.
참고 자료
장순순, 조선후기 왜관의 성립과 왜관정책, 인문과학연구, 31, 2001, 197-226쪽
정성일, 조선후기의 대일무역, 신서원, 2000
김동철, 17~19세기 부산왜관의 개시와 조시, 한일관계사연구, 41, 2012, 223-262쪽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 상인의 구성과 활동, 역사와 세계, 46, 2014, 221-258쪽
김강일, 왜관을 통해서 본 조선후기 대일 구청품목, 일본역사연구, 34, 2011, 111-136쪽
김영록, 조선후기 대일공무역과 송목, 한일관계사연구, 42, 2012, 463-5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