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의 당위성에 관한 고찰 - 15세기 집현전 학사의 관점을 중심으로 -
- 최초 등록일
- 2020.11.07
- 최종 저작일
-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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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훈민정음과 한자 (漢字)
Ⅲ. 훈민정음 창제의 대내적, 대외적 의도
1. 훈민정음 창제의 대내적(對內的) 의도
2. 훈민정음 창제의 대외적(對外的) 의도
Ⅳ. 언어의 이중성 극복과 훈민정음
Ⅴ. 훈민정음의 철학성(哲學性)과 과학성(科學性)
1. ‘역(易’)철학에 근거한 훈민정음
2.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관한 논의
Ⅵ.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
조선 제 4대 세종대왕과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이두(吏讀)나 향찰(鄕札) 와 같은 차자표기(借字表記)의 한계를 인식하고 세종 25년(1443) 12월에 우리의 고유문자이며 표음문자인 훈민정음 訓民正音을 창제했다.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훈민정음>은 17자의 자음과 11자의 모음, 총 28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글 창제와 반포에 대해 당시에는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세종은 한글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활용하도록 하여, 지금의 우리가 쓰는 한글의 根幹이 완성되었다. 창제 당시 훈민정음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본 지면에서는 다음의 근거를 통해 15세기 집현전 학사의 관점에서 훈민정음 창제의 당위성(當爲性)을 논하고자 한다. 첫째는 훈민정음이 한자의 올바른 사용을 도왔다는 것을, 둘째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의도를 대내적, 대외적 관점으로 접근, 셋째로 훈민정음은 당시 언어의 이중생활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는 것, 넷째로는 훈민정음에 담긴 철학 성과 과학성을, 마지막으로는 훈민정음의 반포를 반대한 자들의 언문창제반대상소(諺文反對上疏)를 재반박하며 본고를 마치려 한다.
Ⅱ. 훈민정음과 한자 (漢字)
당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던 이들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사대숭한(事大崇漢)에 위배된다는 것과 학문의 퇴보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우려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고 반포되는 동안에도 한자의 지위가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문과 이두의 사용이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던 것을 통해 훈민정음이 한문 폐기의 대안으로 창제되었다는 주장은 왜곡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은 한 번도 한글이 한자를 대신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세종 단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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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
『訓民正音』 解例本 後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