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바울신학 상세요약본
- 최초 등록일
- 2020.08.06
- 최종 저작일
- 20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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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본 자료는 '바울신학'의 상세요약본입니다.
단순한 리포트에서부터 논문을 작성할 때에 유익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각 챕터별로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페이지 수를 따로 찾을 경우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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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1장 로마의 융성
역사를 살펴보았을 때에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지배한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 그 중 로마야말로 그 국가들과 지중해로부터 떨어져 있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 대해여 가장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도시였다. 로마의 신속한 세력팽창은 고대인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런 로마는 처음부터 강한 도시가 아니었다. 로마는 본래 티베르 강 왼편의 라틴 평원에 자리한 구릉지대에 세워진 유목과 농업에 종사하던 촌락이었다. 심지어 에스투리아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촌락이었던 로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라티움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대군주가 되었다. 또한 서부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세력이 커졌으며, 점차 로마는 근동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따라서 근동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는데, AD 7세기에 이람의 근동 정복이 있을 때까지 로마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 제2장 외국의 통치를 받은 유대인들
페르시아인들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유대의 영토는 예루살렘을 위시한 극히 제한된 영역에 한정되었다. 유대는 일종의 성전국가로 조직되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성도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고 그 제국이 와해되자 유대는 처음에는 프톨레미 왕조에게 종속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셀레우키아인들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대는 AD 66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 돌발할 때까지 간간이 그 제도를 폐지하려는, 또는 수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때를 제외하고 그들의 성례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성례전을 폐지하려던 시도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셀레우키아 왕 안티오쿠스 4세가 행한 것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주로 외적인 치안유지를 하려는 목적으로 유대 백성들을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헬레니즘 생활방식에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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