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3세기 종교 토론을 통해 본 원조(元朝)의 종교 관용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元朝의 종교 관용성
2-1. 종교 토론회의 역사적 배경
2-2. 1254년 종교 토론회의 전개
3. 뭉케期 道ㆍ佛 토론
3-1. 道ㆍ佛 토론의 성립
3-2. 道ㆍ佛 양측의 논리
3-3. 토론의 경과
4. 티베트 불교와 元朝
4-1. 쿠빌라이와 티베트 불교의 접촉
4-2. 쿠빌라이期 티베트 불교의 흥성
4-3. 쿠빌라이期 4번째 道佛 토론
5. 결론
본문내용
몽골의 세계 정복 과정은 세계사에서 매우 놀랍고도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이다. 이들은 광범위한 영토를 이룩하여 지금의 세계화와는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세계적인 통합을 이루어 냈다. 그 이전에도 존재하던 동서 간의 교류는 경제적 무역을 넘어 예술, 각종 기술, 종교 등 각종 분야로까지 확대되어 근대 이전 최초로 세계가 하나로 된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례없는 세계 제국의 탄생으로 인해 이 시대는 단지 중국사의 송대(宋代)과 명대(明代)를 잇는 시간적 중간점의 의미 이상으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설과 사상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 중 략 >
종교 간의 대화는 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종교 간의 우열(優劣) 판단이 아닌 상호 이해 증진을 위해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元代의 종교 토론회는 초기부터 그런 성격과는 판이했다. 이것은 국가는 종교로부터 권위의 확보와 민심 수습이라는 것을 얻어야 했고, 종교는 국가로부터 후원을 받아야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동아시아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즉 거대한 제국에서, 황제라는 절대 권력이 주재하는 토론의 성격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던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황제는 결국 한 개인이었고, 그의 결정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개인적 성향의 표현이 강하게 나타나는 순간 균형을 잃게 된다. 이는 종교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개입은 결국 일방(一方)의 이익을 낳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한편 종교 정책에서의 관용성 상실은 제국의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元朝를 쇠락과 멸망으로 이끈 요인 중 종교 정책에서의 실패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관용성의 상실은 정권의 지지를 받는 종교계의 부패와 그렇지 못한 종교계의 불만과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같은 몽골의 국가였던 훌레구 울루스나 무굴 제국 등 수많은 국가에서 유사한 사례가 나타났다. 우리는 이러한 제국의 관용성의 상실을 元朝에 있어서는 종교 간의 토론회의 성격의 변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고 자료
단행본
김종래, 『결단의 리더 쿠빌라이 칸』, 꿈엔들, 2009
김한규,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 혜안, 2003
김호동.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까치, 2002
르네 그루쎄, 김호동 譯,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 1998
모리스 로사비, 강창훈 譯, 『쿠빌라이 칸』, 사회평론, 2015
모우종지엔, 이봉호 譯, 『중국 도교사: 신선을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 예문서원, 2015
미조구찌 유우조 외, 김석근 외 譯, 『중국사상문화사전』, 민족문화문고, 2003
박덕규,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역사이야기 – 11.원나라』, 일송북, 2006
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마니즘』, 민속원, 2001
사카이 타다오 外, 최준식 譯, 『도교란 무엇인가』, 민족사, 1991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譯, 『몽골세계제국』, 신서원, 1999
와타나베 쇼코. 한경수 譯, 『불교사의 전개 : 인도에서 중국까지』. 1992
티모시 브룩, 조영현 譯, 『하버드 중국사 원·명』, 너머북스, 2014
논문
김희정, 「中國 金·元代 道敎와 佛敎 교섭의 한 형태」, 『도교문화연구』 16집, 2002
中村淳, 「2通のモンケ聖旨から : カラコルムにおける宗教の様態」, 『内陸アジア言語の研究』 23, 2008
程佩, 「蒙元詩期彿道四次辯論之真相探尋」, 『雲南社會科學』 2013年第2期,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