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豪族)의 문벌귀족(門閥貴族)화(왕과 호족의 다른 시각, 같은 결과)』
- 최초 등록일
- 2020.05.09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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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려의 통일과 호족
2. 고려 초기의 중앙 집권화 노력과 호족
3. 중앙집권화에 대한 호족의 반응
4. 문벌귀족 - 왕과 호족의 연합?
본문내용
1. 고려의 통일과 호족
신라 하대, 진골귀족들의 왕위 다툼과 가혹한 수취로 인한 경제생활의 피폐는 점차 신라 왕권을 약화시켰다. 또 이러한 상황은 지방에 대한 중앙의 지배권과 통제권을 약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따라서 중앙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경우 자신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기반을 두고, 자신만의 독립된 영역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세력들을 호족(豪族)세력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그들끼리 혼인하거나 전투를 통하여 점차 통합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더불어 신라의 골품제도에 불만이 있던 세력, 특히 6두품 세력을 자신의 휘하에 포섭하여 그 정치적, 사상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견훤(甄萱)이나 궁예(弓裔) 역시 이들 호족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점차 군소호족을 통합하여 신라를 대체할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후삼국)
후삼국을 고려라는 나라로 통일한 태조 왕건(太祖 王建) 역시 호족출신으로써, 그가 혼란스러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뿐만이 아니라 군소호족들의 막대한 힘이 필요했다. 흔히 ‘혼인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왕건의 정책은 호족들의 힘을 한곳으로 규합시켜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으로써, 이는 중앙 집권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족 연합체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군소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해 회유책과 강압책을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명주(지금의 강릉) 출신의 대호족인 김순식(金順式)의 회유나 나주(羅州)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洪承基,「高麗前期의 事審과 鄕吏」,『高麗政治史硏究』, 一潮閣, 2001.
박용운 ,「고려전기 귀족사회의 성립과 전개」, 『고려시대사』, 일지사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