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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초기의 사상(이항로와 김옥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3. 보급과정 및 전개
4.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5. 위정척사사상의 의의와 한계
6. 개화파의 형성
7. 김옥균의 개화사상
1) 자주독립론
2) 제도개혁론
3) 근대교육론
4) 경제부국론
8. 개화사상의 의의와 한계
9. 나가며
본문내용
1.들어가며
조선 후기 사회는 내정의 부패로 인한 민생의 파탄과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이라는 이중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서로 그 해결책을 달리하였다. 위정척사파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실현함으로써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개화파는 궁극적으로 서구 시민사회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본 발제문에서는 이항로와 김옥균을 중심으로 근대초기의 사상의 성격을 알아보고자 한다.
2.위정척사사상의 대두
위정척사상은 주자학적 정치사상의 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바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다. 이러한 이유는 서양의 이질문화가 도전해 오는 위기상황에서 이단에 대해 정학(正學)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발흥된 것이었다. 대두된 원인은 서학이라 일컬어지던 천주교가 영·조시기에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는 전통적인 예교질서를 파괴하는 교리 및 행동을 수반하고 있었다. 부모와 선조의 제사를 부인하고 전통적으로 최고선으로 존중되어 오던 효와 충의 가치를 절하시키며 삼강오륜의 절서체계를 파괴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주자학적 사상으로 규율되어 오던 전통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사상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그 교세가 점차 커지고 반유교적 정신과 행동이 실천적 차원으로 드러나게 되자 이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동시에 주자학적 정치윤리사상을 정학으로 지키고자 하는 위정척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3.보급과정 및 전개
조선 말기에 대두된 이러한 위정척사사상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그리고 화서의 제자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黙) 등에 의해 크게 보급되었다. 특히 화서의 위정척사론은 중암에 의해 보다 발전적으로 집대성 되는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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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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