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의 성격과 4.19 혁명
- 최초 등록일
- 2019.08.27
- 최종 저작일
-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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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정권의 성격과 4.19 혁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이승만 정권
1. 자유당의 결성
2. 자유당의 반공, 반일 정책
3. 자유당의 정치활동
Ⅲ. 4.19혁명
1. 4.19혁명의 배경
2. 4.19혁명의 전개과정
3. 4.19혁명의 결과와 정치사적 의의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광복 이후 이승만은 두터운 국민적인 지지와 신망을 얻고,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탄탄한 기반을 남한에 구축한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그는 인심에서 멀어져갔다. 국회에서도 정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자신의 세력 기반이 될 수 있는 정당 창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결성된 것이 이승만의 자유당이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유지를 위해 경찰, 군부 등을 통해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부정선거, 반공과 반일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활용 등의 다양한 수단을 이용했다. 이후 이승만은 종신집권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며, 곧 3.15부정선거를 일으키게 되며, 이는 4.19혁명을 낳게 되었다.
지금부터 이 발표문에서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성격은 어떠하며 후에 일어난 4.19혁명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려고 한다.
Ⅱ. 이승만 정권
1. 자유당의 결성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쟁 초반부터 전쟁 대처능력에 대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였다. 특히 정부가 “국민방위군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등의 실책을 거듭함에 따라 국회는 정부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고 반정부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1951년 5월 이시영이 국정운영의 파행을 통감하며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야당의 거물인 김성수가 부통령으로 당선됨에 따라 국회의 분위기는 점점 더 야당세가 강하게 된다.
본래 이승만은 정당에 대해서는 정당 무용론을 주장했다. 일반 국민이 정당의 의미를 철저히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중 민심이 이반되고, 야당이 점점 세를 얻게 되자, 국회에서 선출하는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의 당선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종래의 정당무용론을 버리고, 정당육성을 주장했다.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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