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9.04.01
- 최종 저작일
- 2019.03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박형룡의 생애
3. 생애의 따른 신학
1) 신성, 숭실전문, 난징 금릉학교의 영향
① 신성중학교
② 숭실전문 학교
③ 난징 금릉학교
2) 프린스턴, 남침례신학교의 영향
① 프린스턴 대학
② 남침례교 신학교
3) 귀국 후 상황과 신학
① 1930-50년대
② 1960년대, 이후
4. 박형룡 신학의 의의
1) 변증적 특징과 고백주의적 특징
2) 교리적인 성격
3) 성서 무오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
5. 박형룡의 신학적 한계
6. 결론
본문내용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 라는 Arnold Joseph Toynbee(아놀드 토인비)의 명언이 있다. 박형룡은 일부 현대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극단적 근본주의자’, ‘교회 분열을 일으킨 어제의 인물’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그의 신학을 폄하만 한다면, 신학적 체계가 잡히지 않은 과거 혼란스런 한국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정체성를 지키기 위해, 신학도들 양성을 위해 투쟁한 역사적 인물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세상은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하게 된다. 한 사람의 신학에 있어서도 부동적인 신학관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박형룡의 신학 또한 변해갔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신학관에 영향을 미쳤던 생애를 중심으로 박형룡의 신학관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앞으로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신학의 교훈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박형룡의 생애
박형룡은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마치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의 금릉대학과 1926년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에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시작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1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1938년 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일본 동경으로 피신하여 성경주석의 집필에 전념하다가 1942년 만주로 옮겨가 동북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1947년 7월까지 그 일을 계속하다가 고려신학교 측에서 파견된 목사 송상석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6월에는 교단 내부의 문제로 사임한 뒤,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1953년에는 총회직영의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으로 은퇴하였고 그 뒤로는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2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참고 자료
김영재.「한국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6.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학기독교, 1982.
박용규.「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6.
박용규.「한국 교회 인물사」. 서울: 복음문서선교회출판부, 1975.
송길섭.「한국신학사상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7.
유동식.「한국 감리교회 사상사」. 서울: 전망사, 1993.
유동식.「한국신학의 광맥」. 서울: 전망사, 1983.
장동민.「한국 보수신앙의 수호자」. 파주: 살림출판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