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가야의 시대상황 및 당시 과학기술의 배경.
2. 본론: 가야시대의 과학문명과 기술.
2.1. 가락국(가야)의 철기문화의 의의.
2.2. 가락국(가야)의 성형수술.
2.3. 과학과 예술의 만남. 적갈색 토기.
3. 결론: 가야시대의 과학문명이 후세에 끼친 영향 및 본인의 생각.
3.1 맺음말.
본문내용
한반도에 철기가 처음 출현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4세기경이다. 당시 등장한 철기는 보편화된 청동기문화를 대체할만한 수준은 아니었기에, 철기로 만들어진 것은 간단한 공구류 정도였다. 기본적인 생산도구들의 재료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였다. 역사적 측면에서 사료들을 검토한 결과, 가야 제국이 성립된 후로부터 기원 후 300년경까지는 완전한 철기시대라고 증명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기원 후 1세기부터 가야 제국에 철기문화가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며, 가야의 주된 성장의 원동력이 바로 이러한 ‘발달한 철기문화’에 기인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청동기시대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농기구’를 농사에 사용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철기의 등장으로 인하여 ‘철제 농기구’가 생산되었고, 쇠도끼 등의 신형 농기구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철제 농기구의 확산과 우경의 시작은 농업 및 생산 영역에 있어서 비약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구를 증가시켜 국력향상의 원동력이 되었다.
생산력의 증가로 인한 잉여의 발생과 사유재산의 확대는 구성원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는 곧 분쟁과 전쟁의 격화로 연결되었다. 철제 칼, 철제 화살촉 등의 신형 무기들이 개발되었으며 투구, 갑옷 등도 최신식 철제 장비로 교체되었다. 기존에 사용되던 청동 무기들은 이러한 철제 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철제 무기의 대량생산은 단순 보병 및 궁병 등으로 이루어진 기존 군대의 틀을 탈피시켜, 철제 마구류 등으로 무장한 기병 등의 다각적인 병종의 부대 편성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전투의 규모 역시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기존 전쟁의 승패 여부가 개인의 완력 등에 좌우되었다면, 향후 전쟁의 승패 여부는 우수한 철제 무기의 확보 여부에 좌우되었다.
가야 제국은 4세기 이후부터 철정(鐵鋌)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화폐와 같이 사용되면서 국외에까지도 전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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