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성립
- 최초 등록일
- 2017.11.29
- 최종 저작일
-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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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왕양명
1) 시대적 배경
2) 생애
3) 심즉리와 치양지
2. 왕양명王陽明 심학心學에서 ‘심心’ 의미 연구
1) 시작하는 말
2) 양명의 심즉리설
3) 육상산陸象山의 심즉리에서 보이는 ‘심’
4) 심즉리기의 ‘심’: 리 창출의 근원
본문내용
[시대적 배경]
몽골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천하를 회복한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한때 머리를 깎고 승려 노릇을 했었고, 개인적으로는 유학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랫동안 격하되었던 중화문명을 부활시키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이룩하려면 옛 남송 땅인 강남에서 주자학을 익혀온 선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리하여 원대에 침체되었던 과거제를 확충하면서 시험 과목을 사서(四書)로 정하고, 이 때 주희(朱熹, 1130~1200)의 주석본을 표준으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주자학은 백수십년 만에 관학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왕조의 선비들은 원왕조 때와 달리 학자이자 관료로서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근간 노릇을 할 수는 있었으나, 송왕조 때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기란 힘들게 되었다. 이처럼 선비의 기개를 살릴 수 없어지면서 주자학은 단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익히는 입시용 학문이 되어 버리는 경향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원왕조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학이 진흥되다 보니, 주자학을 출세를 위해 배우기보다 그 학문 자체가 좋아서 열심히 익히는 사람들도 나오게 된다. 왕양명(왕수인)도 그런 사람이었다.
[생애]
양명(陽明)에 성을 붙인 ‘왕양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왕수인은 명왕조가 수립(1368)된 백여 년 후인 1472년, 지금의 저장성(황저우)에 있는 여요에서 명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육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명필 왕희지도 그 일원이었다.
왕수인이 11세 때 개인 교사에게 수업을 듣다가 “공부의 목적은 과거 급제에 있다”는 스승의 말에 “아닙니다. 공부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스승을 당황케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왕수인은 오직 공부에만 뜻을 둔 학구파는 아니었다. 시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도 있어서 간혹 빼어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으며, 친구들과 시 짓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