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설화를 바탕으로 설화소개, 경덕왕 설명, 경덕왕릉과 그 진위논쟁 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설화 해석
Ⅲ. 忠談師와 表訓大德 그리고 鄕歌
1. 「安民歌」
2. 忠談師와 表訓大徳
Ⅳ. 佛國寺
1. 大雄殿
가. 靑雲·白雲橋
나. 多寶塔과 釋迦塔
2. 毘盧殿
3. 極樂殿
Ⅴ. 景德王과 景德王陵
1. 景德王
2. 景德王의 婚姻과 貴族 社會
3. 景德王대 官號개혁에 대한 이해
4. 景德王陵
5. 景德王陵에 구현된 墓制와 十二支神像
6. 景德王陵 眞僞論爭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新羅는 천 년에 달하는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왕조 중 하나이다. 그 기나긴 역사만큼 문화 또한 찬란했는데, 그 흔적들은 아직까지 대한민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초기의 신라는 고대국가 수준으로 발전한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인 나라였다. 高句麗와 百濟가 佛敎를 받아들일 때 토속적인 신앙을 여전히 믿고 있었고, 고구려가 4세기 小獸林王 때 반포한 律令을 신라는 6세기 法興王 때에 이르러서야 반포했다. 이처럼 후진적인 정치와 문화를 갖고 있었던 신라는 차츰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하여 통일왕조를 이룩했다.
통일 직후인 8세기를 전후하여 신라는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이 시기는 신라 中代에서 下代로 이행되었던 시기이다. 또한 佛國寺가 창건되고, 多寶塔과 釋迦塔이 만들어지고, 聖德大王神鐘이 만들어지는 등 통일신라의 문화가 활짝 꽃을 피웠던 번영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정치사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왕당파와 반대파의 구도를 바탕으로 景德王代와 惠恭王代를 살핀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 연구들은 대체로 중대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전제왕권과 귀족의 대립, 왕실과 외척 및 귀족세력 간의 역학관계, 상대등과 侍中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의 실태를 밝히기 위한 연구 등이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는 당시의 상황을 왕권과 귀족세력 간의 대립으로 파악했고, 나아가 전제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게 표출되었던 시기로 규정하는 등 단편적으로 정의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간과한 것으로 신라 중대의 정치사를 일률적으로 정의했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 중대는 비록 신라 문화의 황금기라고는 하지만 지배 세력 간의 분열 징후가 나타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특히 경덕왕 16년의 祿邑 부활은 귀족세력의 강화를 야기했고 수많은 災異는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정치적인 불안정과 사회적인 혼란으로 서서히 분열의 시대로 넘어가는 문화의 교체기이자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는 정치적 과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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