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교육과 정책의 이해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 속에서도 "다문화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례
- 최초 등록일
- 2015.08.04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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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서론
II. 본론
III.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990년대에 우리 사회는 국제결혼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국내에 취업을 목적으로 들어오면서 다문화가정이 지속적으로 증가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단일민족이라는 인식과 자부심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타 민족에 대한 인종주의적 배타성이 강하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양한 민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았고 이민족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본 강의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로 지구촌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한국적 사고방식과 단일민족 국가라는 배타성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 다방면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본 보고서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다문화적’ 이라고 불 수 있는 사례를 중점적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인물에서 찾을 수 있는 ‘다문화적’ 사례
① 베트남 왕자 ‘이용상’
고려는 다른 나라와 무역활동을 활발히 하는 나라였다. 근거→인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외국인을 받아들여 한반도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주었는데 이 때 고려에서 귀화해 살았던 외국인은 중국인․여진인․거란족․몽고인 등 약 17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가운데 베트남 왕자의 신분으로 고려에 망명을 와서 고종 때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이용상은 땅과 식읍을 상으로 받고 화산군이 되고 고향을 그리워하다 우리나라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화산 이씨의 시조로 모셨고 그의 후손들이 800년 가까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1995년부터 해마다 베트남에 초청받아 간다고 한다.
② 네덜란드인 ‘박연’
조선 때 귀화한 네덜란드인 박연은 1627년 일본으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되어 경주 앞바다로 밀려들어오게 되는데 먹거리를 구하다 주민들에게 붙잡혀 동래부사에 인계 된 후 4~5년간 부산에 머물다 인조의 명령으로 서울에 올라갔다.
이 시기는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청의 재침략에 맞설 군사력 확보가 시급했다. 이에 따라 서양 화포인 홍이포에 관심을 가진 인조가 박연을 불러 올렸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