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자장(慈藏)의 생애
3. 자장의 사상
1) 율사 자장의 사상적 배경
2) 대국통 자장과 불교치 국책
4.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자장(慈藏)은 7세기를 대표하는 신라 승려로서 우리에게는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선덕여왕(善德女王)에게 황룡사(黃龍寺) 9층탑 창건을 건의한 인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자장이 당시 신라에 미쳤던 정치·사회·사상적인 영향력을 보면, 그가 지닌 역사적 함의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장은 신라의 정치적·사상적 격변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그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원광(圓光)이나 후대에 활동했던 원효(元曉) 등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국정 국사교과서나 개론서에서도 자장의 활동을 설명하는 부분은 현저히 적다. 자장의 비중이 적게 다루어지는 것은 그가 다른 승려들보다 일찍 입적했던 사실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장의 생애와 위상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성과가 축적되어 있으며 도출되어 있는 이견들을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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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은 도덕적인 측면을 가진 것으로 자장은 지율(持律)을 통해 당시 신라 승려들의 도덕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는 교단통제를 위해서 구체적인 규제가 필요했으므로, 출가자 위주의 계율이라 할 수 있는『사분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는 출가자 개개인의 죄악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금기적 측면과 교단을 규율한다는 타율적 측면이 두드러진다.
삼국시대에는 승니들이 첩자로 많이 활동하였다. 특히 장수왕이 보낸 도림(道琳)에 의해 백제는 수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이 고갈됨으로써 고구려의 공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웅진으로 천도까지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의 불교공인이 늦은 이유도 이러한 승려들의 첩자로서의 활동이 부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실제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전도승인 정방, 멸구비 등이 신라에서 죽임을 당한 것도 이들이 첩자인 것으로 오해받은 측면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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