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간호사
- 최초 등록일
- 2013.05.19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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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1. 1966년부터 약 10년간 해외로의 본격 진출
2. 파독 간호사
3. 우정회 - 파독 간호사의 산 증인
4. 그 외 간호사
▶결론
본문내용
▶서론
-우리시대의 상황(1960-1970)
1960년 초부터 1970년대까지 7천여 명의 간호사들이 국가경제를 살리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우리나라 간호사들의 탁월한 간호기술과 성실한 근무태도는 민간사절단 역할도 톡톡히 해냈으며 세계가 한국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들이 고국에 송금한 봉급은 곧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고 한국 노동자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물꼬를 트는 계기로 작용했다. 독일에 진출한 간호사들은 그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우리나라가 빈곤국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큰 몫을 해냈으며, 또 재외한인사회 구축과 한민족의 세계화에도 기여했다.
▶본론
1. 1966년부터 약 10년간 해외로의 본격 진출
우리나라가 경제국가 건설과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의 시기였던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많은 한국 간호사들이 독일(서독)로 건너갔다. 간호사들이 낯선 이국땅 독일에 첫발을 내딛던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달러, 한국은행의 외화 보유 잔고 2,300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 등으로 빈곤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여기에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인구증가와 실업증대로 인한 사회불안은 고조되어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특히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가 중단되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 략>
장검현은 필리핀의 유니온칼리지를 졸업하고, 이어서 시브닥터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거기서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했다. 1981년에 귀국한 장검현은 그해 실시한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서울위생병원의 의사가 됨으로써 금의환향의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다. 장검현은 그곳에서 상당 기간 동안 의술을 베풀다가 소아과 전문의가 되어 부산에다 소아과 의원을 차렸다. 그는 불우한 이웃을 위한 무료진료 활동,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자신이 한국 최초의 남자 간호사가 되어 우리 의료계의 발전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자부심과 명예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공인의식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