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아르누보
- 최초 등록일
- 2013.04.19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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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르누보는 벨기에에서 일어나 그 영향은 전 유럽에 미쳐 각기 다른 특성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서 개화시켜 ‘900년 양식’이라고 불려지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아르누보의 중추는 벨기에와 프랑스였다.
당시 공업 선진국이었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세기말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거점(大據點)이었다. 젊은 학도 츠바이크(stefan Zweig)는 하계휴가의 여행지를 완벽히 검토하고 뜻을 벨기에로 결정했던 것이다.
벨기에서 아르누보의 형태는 현저하게 추상성이 풍부하여, 꽃모양 등은 준엄하게 거절되었다. “벨기에 곡선”(리네 베르쥬)의 대표인물 빅토르 오르타는 낭시(Nanci)파의 루이 마조렐과 같이 클레이(점토)모델을 만들어서 건축이나 가구를 디자인한 것처럼, 그의 조소적 디자인의 비밀은 그 주변에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반 데 벨데는 기능 우선주의자이며 그런 이유로 오르타와는 달리 작가 생명이 길었다. 그는 아루누보의 창시자이자 이론적 지주로 주목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일찍이 묘사적 장식의 배제를 제창하고 “장식은 항상 기능을 암시하고 이성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제언했다.
<중 략>
- 재료 및 형태특성
귀마르는 프랑스에 있어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파리의 지하철이 귀마르로 하여금 도시 지하철이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목적을 위해 전혀 새로운 재료로 디자인하도록 한 것은 시대적인 감각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빠른 운송수단에 대한 안내로서 적합한 경쾌한 분위기에 있다. 그러나 그 세부는 뼈대같은 구조로서 뻐기고 있는 듯한 형상인데 이것은 10여년 전의 알프레드 길버트의 작품과 유사하다. 모든 곳에서 직선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한 점과 전체적인 창작 감각은 귀마르의 작업이 아르누보에 견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나타낸다. 유기적이고 자유로운 형태, 유리붙임 천개면의 경쾌한 분위기, 교환가능한 프리패브 주철과 유리와 같은 부품을 이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만하다. 그 조합에 따라 출입구를 둘러싸거나 천개면을 붙이는 등 다수의 변화를 통해서 구조 합리주의의 사상을 달성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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