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원방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연구 과제
- 최초 등록일
- 2013.04.15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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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성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원방침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
1. 통신활동
2. 군자금모집 및 기타 활동
3. 해체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Ⅷ. 향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구 과제
Ⅸ.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국공합작체제는 1940년 봄을 고비로 현저히 흔들렸고 한인 좌파 세력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성격은 이때 크게 변화하였다. 1938년 10월 말 무한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더 이상 대규모 진공을 하지 않게 되자 중일전쟁은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반면 국공 간의 단결 분위기는 그만큼 약화되었고, 역으로 국공간의 갈등은 점차 표면화되었으며, 국민당 내에서는 반공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그런 가운데 국민정부 내의 “반동적 실력자인 하응흠 등”은 국공합작에 편승하여 성장한 경쟁자 진성을 추락시켜 나갔다. 진성은 그간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 1940년 3월 군사위원회 정치부장 직에서 물러났다. 아마도 중공 세력의 성장과 그에 따른 국민당의 상대적 손실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북 경우 1939년 하반기에 이곳에서는 국민당계 부대와 공산당계 부대간의 충돌이 있었고 공산당계 군대가 승리하였다.
< 중 략 >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1960년대에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통합과정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에 들어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던 터전을 찾는 것으로서 1910년대 상해지역의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정부 수립을 처음 제안한 「大同團結宣言」이 발굴분석됨으로써 정치적 맥락을 찾았다.
80년대 후반에 임시정부의 통합과정에 대해서는 상반된 연구가 나왔다. 그것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정부 사이의 통합에 관한 것인데, 기존 연구는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삼고 1919년 9월에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아우르는 통합 정부를 달성함으로써 정통성 확보와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연구에서는 이를 완전한 통합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 이유는 첫째 대한국민의회가 해산을 선언하고 통합되었지만 불완전한 것이었고, 때문에 ‘승인개조분쟁’이 일어났으며, 결국 대한국민의회가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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