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의 순교와 그 정치적 상징성
- 최초 등록일
- 2013.02.28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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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차돈의 순교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을 당시 시대상과 함께 담은 리포트입니다. 각주 및 참고문헌은 양식에 맞추었습니다. 리포트 제목은 `정치생명을 건 법흥왕의 결단, 그리고 그 정치적 상징성과 신화화`입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제 1장 힘의 불교
3.제 2장 정치생명을 건 결단
4.제 3장 정치적 상징성과 신화화
5.나가며
본문내용
527년 이차돈이 처형당한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 ‘이차돈의 순교’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신라에서 불교의 공인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이차돈의 죽음을 순교라고 보는 것은 얼핏 보면 매우 자연스럽다. 이차돈의 죽음을 기점으로 신라에는 불교가 공인되었고, 그렇게 공인된 불교는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한반도의 중요한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차돈은 승려가 아니었다. 해동고승전에서 법흥왕은 이차돈을 ‘충신(忠臣)’으로 표현한다. 삼국유사에서도 이차돈을 표현하는 말은 내양자(內養者), 충신(忠臣), 사인(舍人)과 같은 세속적인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왕의 측근인 이차돈이 왜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그의 죽음이 어떤 작용을 하여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는 당시 신라의 정치상황과 불교사상의 성격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중 략 >
흔히들 이차돈의 처형사건을 불교 공인을 위한 이차돈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이차돈의 죽음은 단순한 ‘순교’가 아닌 다양한 정치적 함의가 있는 사건이다. 단순히 불교를 위해 죽어 목에서 흰 젖이 솟아올랐다는 기현상에만 초점을 두는 것보다는 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신라의 정치상황, 당시 불교의 위치 그리고 그걸 기린 후대 신라정권의 의도까지 포괄하여 전체적인 맥락에서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이차돈의 죽음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이해하는 방법이라 하겠다.
법흥왕과 이차돈은 왕권이 강화되는 것이 단순히 왕의 권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신라가 패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왕의 가까운 신하이자 숙질이 자신이 섬기던 왕에 의해 참수당하는 비극이 있었으나, 이를 통해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훗날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일연은 이를 위해 희생한 이차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讚)한다.
참고 자료
신종원, 「법흥왕은 왜 불교를 공인했나」,『내일을 여는 역사 제6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1.
여징(呂澂) 저, 각소 역, 『중국불교학 강의』, 민족사, 1992.
곽승훈, 『통일신라시대의 정치변동과 불교』, 국학자료원, 2002.
일연 저, 권상로 역, 『삼국유사』, 동서문화사, 2007.
KBS역사스페셜 제17편, ‘이차돈의 순교는 정치쇼였나?’, 2005.9.2 방송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