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전투에 대한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2.11.07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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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춘천 전투의 배경
2.춘천전투의 작전계획
3.전투 과정
4.전투의 결과 및 영향
5.나의 소감과 결의
본문내용
1.춘천 전투의 배경
당시 김종오 대령이 이끄는 제6사단은 지휘소를 원주에 두고 우익은 789고지를 경계로 하여 이정일 대령이 이끄는 제8사단과 그리고 우익은 주목리를 사이에 두고 유재흥 준장이 이끄는 제7사단과 각각 연계하고 있었다.
이때 사단의 우일선인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제2연대는 지휘소를 공천에 두고 그 예하의 제3대대는 연대의 오른쪽 제 1선으로 789고지-우준리 간을, 그리고 제1대대는 왼쪽 제 1선으로 873고지-오산동 간을 각각 방수하고 있었으며 제2대대는 연대 예비로서 당포리에 배치하였다.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제7연대는 춘천에 지휘소를 두고 제2대대는 제2연대1대대와 연계하여 양통리까지, 그리고 제3대대는 이에 이어 주목리까지 각각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중 제11 및 12 양 중대는 연대의 예비인 제1대대와 함께 춘천에 있었다.
제7연대는 그 전해인 1949년 2월 20일에 사단으로 예속되어 청주로부터 원주로 약진하여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친 후 5월 3일에는 현 진지 춘천으로 진입하여 서종철 중령이 이끄는 제8연대로부터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으로 침습한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포착해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3개월간에 걸친 방어로 해당 지역의 지형을 숙지하게 되고 또한 군관민의 통제가 어느 곳보다도 공고하였다.
또한 제7연대는 대대전투훈련을 마쳤으며 우수한 장교의 피교육차출을 기피하는 당시의 풍조를 깨고 대부분의 장교들을 해당학교에 파견하여 보수과정교육을 마치도록 하였다.
진지공사에 있어서는 춘천정면은 제7연대가 진입하자마자 전선으로부터 시내가 불과 12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음을 감안하고 공사를 서둘렀는데 육군본부에서는 예산상 공사를 지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자 자체 인력만으로 해결하기고 결정하고 사단으로부터 공병 1개중대를 지원받아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으로 9개소(장재동 : 1개소, 인남리로부터 춘천간 : 6개소, 서상리 : 1개소, 지암리 : 1개소)에 유개 콘크리트와 그리고 중대마다 2 ~ 3개소의 통나무로 만든 유개호를 마련하고 호간에는 연락호로 연결하였으며 진전에는 지붕형 철조강을 쌍선으로 치고 그 중간에는 대인지뢰를 묻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