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왜 관우를 숭배할까?
- 최초 등록일
- 2012.11.06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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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사 과제로 제출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서론
중국에서 관우는 사람이 아니라 신입니다 중국인들은 관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관공, 관성대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후세에 우리가 부르는 관우와 역사 속 관우는 차이가 확연하지요. 그의 모습인 수염이 길고 얼굴이 대추빛은 관우는 신인관성대제이고 역사속의 관우는 수염만 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염이 긴 대추빛의 관우가 어째서 13억 중국인의 존경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궁금증을 해소 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본론
⑴ 관우는 누구인가?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穆侯)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公)이라고도 불렸다. 죽은 뒤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관제성군(關帝聖君)’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관제군(關帝君)’, ‘관제(關帝)’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인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湖)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도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폭리를 취하는 염상(?商)을 죽이고 유주(幽州)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과 이름도 바꾸어 관우(關羽)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중 략>
임진왜란 이후 방치됐던 관왕묘가 다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숙종 17년 2월, 선조 이래 처음으로 동묘에 제사를 지내면서부터였다. 숙종은 관우를 경모하며 직접 시문을 지어 관왕묘인 동묘와 남묘에 걸어둔다. 영조 시대에는 관왕묘 제사가 정식 국가 의례로 편입됐고, 정조 시대에는 기존의 소사에서 중사로 격상된다. 왕권을 강화하고 충의를 강조하고자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다. 이후 일제 때 사당이 금지됐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을 기다리는 염원과 함께 관우신앙이 더욱 확산된다.
중국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은 3000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30만개로 그만큼 중국인들의 관우숭배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한 명의 장수에 불과했던 관우의 지위가 송나라 때는 무안왕, 관성제군 으로 점점 상승되어 청나라 때에는 관성대제라는 신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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