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독후감
- 최초 등록일
- 2012.01.22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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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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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구는 안동현에서 1919년 2월, 영국 상인 죠지 쇼우의 윤선을 타고 동행 15인과 함께 4일간의 항해 끝에 상해 포동선창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살고 있던 김보연은 김구를 찾아가 자기 집에 함께 있기를 청하였다. 그날부터 그의 집에서 살면서 김구의 상해활동은 시작되었다.
당시 상해에 있는 한인은 500여명 가량 되었다. 그 가운데 약간의 상업 종사자와 유학생, 10명 남짓의 전차회사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본국, 일본, 미주, 중국, 러시아 등에서 모여든 지사들이었다.
본국 13도 각 대도시는 물론이고, 궁벽한 항구나 시골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물 끓 듯했고, 해외 우리 한인들도 어디에 거주하든지 정신으로나 행동으로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소위 한일합병의 참된 의미를 그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왜놈에게 병탄당해도 당, 원, 명, 청나라 시대와 같이 우리가 완전 자치를 하고 명의상으로만 왜의 속국이 되는 것으로 아는 동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합병 후 안악 사건을 조작해낸 것과 105인 사건의 참학 무도한 것을 보고 나서는 언제 망하려나하는 암각점이 격발될 기분이 농후하였다.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상 두 가지 원인으로 만세운동이 폭발하였다.
상해에 모여든 여러 청년들 중심으로 정부조직이 운동 진전에 절대 필요하다는 소리가 안팎으로 점차 높아져, 각 곳에서 상해에 온 인사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이승만을 총리로 임명하고, 내무, 외부, 군무, 재무, 법무, 교통 등의 부서가 조직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미주로부터 상해에 와서 내무총장으로 취임하였고, 각 부 총장은 멀리서 미처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장들을 대리로 국무회의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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