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의 생애, 정치, 기행과 리비아의 향후전망
- 최초 등록일
- 2011.11.01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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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카다피가 통치한 지난 40여 년간 리비아는 각종 테러뿐만 아니라 반미 무장단체 지원 등으로 국제 사회에서 악명이 높았다. 1985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와 오스트리아 빈의 동시 테러, 1986년 독일 베를린 나이트클럽 폭발을 주도하였다. 특히 1988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이 탑승한 미국 팬암기를 폭파시켰고, 국제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중동의 미친 개”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던 그가 2011년 10월 20일 총살당했다. 각종 기행과 독재로 세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카다피의 일생, 기행행적, 정치, 향후 리비아의 미래 향후 전망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목차
1. 카다피의 생애
2. 카다피에 대한 상반된 평가
3. 카다피의 저서 `그린북`속에 담겨진 사상
4. 카다피의 기인행적
5. 빈라덴, 알카에다와의 관계
6. 리비아 정권붕괴에 따른 과제와 향후전망
본문내용
Muammar Gaddafi
1. 카다피의 생애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 미냐르 알카다피 (1942.6.7~2011.10.20)는 리비아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1969년부터 2011년까지 리비아의 최고지도자로, 가다피라고 부른다.
1972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정부 문건, 관영통신에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지칭하여 독재정치를 펴왔다.
갖가지 기행을 일삼고 1969년 육군 대령으로 복무 중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정을 폐지하고 1970년 리비아의 국가원수와 국가평의회 의장, 총리 겸 국방장관에 올랐는데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독재권력을 강화했다. 리비아 지역이 1551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로 리비아 최장기 국가 지도자로 2009년 2월~2010년 1월까지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내었다.
카다피는 리비아 시르테 주 시르테 근처에 1942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일파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는 어릴때부터 공부, 출세에 대한 의욕, 욕망이 남달랐다고 한다. 1952년 10살 때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거기에 영향을 깊게 받고 그의 아랍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이념을 따라 아랍세계를 통일하고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하였다.
1963년 벵가지 리비애 대학교 졸업 후, 벵가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당시부터 학생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했고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으며, 귀국 후 통신부대 장교로 부임했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동료 장교들과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며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고, 당시 터키 체류중이었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