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정시대의 법제를 논함
- 최초 등록일
- 2010.12.30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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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 프랑스시대왕정
2. 왕정시대의 지배자
3. 프랑스 법사 정치적 배경
4. 프랑스 왕정시대의 재판제도
5. 관습법의 성문화
6. 성문화의 효과와 ‘프랑스고유법’ 사상의 탄생
7. 프랑스왕정시대의 법원
목차
1. 프랑스시대왕정
2. 왕정시대의 지배자
3. 프랑스 법사 정치적 배경
4. 프랑스 왕정시대의 재판제도
5. 관습법의 성문화
6. 성문화의 효과와 ‘프랑스고유법’ 사상의 탄생
7. 프랑스왕정시대의 법원
본문내용
1. 프랑스시대왕정
①. 종교전쟁
프랑스의 종교적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있었다. 1508년 르페브르 데타플은 원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썼고, 불어 성서를 간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1518년 기욤 브리소네의 온건한 인문주의적 개혁(성직자들을 교구에 머물게 하기, 신도들에게 성서 읽어주기)으로 나타났다. 이는 프랑수아 1세와 마르그리트의 꽃이라 불리우는 그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톨릭에 반대할 의사는 없었던 이들은 칼뱅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불길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과격화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브리소네는 곧 자신의 개혁적인 교리를 철회했다. 프랑수아 1세는 성 루이의 후손으로서 가톨릭 보호를 책임으로 알고 있었지만 신교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534년의 `벽보사건` (신교도들이 파리 시내와 국왕의 침실문에까지 붙인 성사를 부정하는 격문) 으로 광신에 실망한 왕은 가톨릭으로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앙리 2세의 시기에, 프랑스의 신교는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칼뱅파의 교리와 조직을 완전히 수용하여 위그노라는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 종교개혁의 특징은 귀족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왕족인 나바르 가, 부르봉 가, 콩데 가, 샤티옹 가, 앙들로 가, 콜리니 등의 쟁쟁한 대귀족들이 모두 신교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가톨릭 귀족들의 세력도 강했고, 이러한 세력의 균형은 프랑스를 수십년 동안의 종교전쟁으로 빠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떤 한 세력도 다른 한 세력을 완전히 없애버릴 만큼 세력이 강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서로 치고 받으며 낭트 칙령의 등장까지 8차례나 되는 종교전쟁을 치렀다.
앙리 2세는 프랑수아 1세와 달리 위그노에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사랑한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 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녀는 앞으로 가톨릭 세력을 이끌어나가게 될 기즈 가문을 부상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