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윤백남의 〈大盜傳(대도전)〉연구 리포트입니다.A+ 받은 자료입니다. 받아가시는 모든분들이 좋은 점수받기 바랍니다.
많은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Ⅰ. 서 론Ⅱ. 〈大盜傳〉에 나타난 현실인식
1. 대중 지향적 문학관
1) 흥미본위의 인물설정
2) 강자 우위의 세계관
2. 작품에 나타난 민권의식
Ⅲ.〈大盜傳〉의 의의와 한계점
1. 의의
2. 한계점
Ⅳ. 결 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1920년대까지만 해도 단편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우리의 근대소설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장편들이 발표되기 시작한다. 그중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역사소설이었다. 역사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쓰여진 시대의 시각으로 과거의 역사철학적 구조를 반영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소설이 필요했던 이유는 첫째, 거의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는데다가 일제 강점기 아래였기에 일반민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역사에 대해 쉽게 다가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역사라는 것은 그저 높은 사람들의 일 따위가 아닌 민족 전체의 것이며 민중의 것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3. 1 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를 남의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3. 1운동을 통한 민중의식의 전환․각성은 ‘역사는 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고, 그것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의식이 생겨남을 뜻했다. 셋째, 신문의 상업적 성격에 발맞춘 역사의 상업화가 그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문의 발행부수가 늘어나게 되자 신문의 페이지를 늘리고 그 자리에 소설을 싣게 되는데 이러한 소설들은 당연히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통속적․대중적 성격을 띄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 가운데는 역사소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윤백남의 역사소설 〈대도전〉또한 이러한 역사의 상업화적 성격을 강하게 띄는 소설이다.
작가 윤백남은 1888년(고종 25년) 윤치병과 조옥의 삼남 이녀 중 이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공주이며, 출생지는 서울이다. 그의 부친은 한말 정치가였고 합방 후 백남은 이런 부친의 활동을 그다지 좋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11세에 일본계인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수재라는 평판을 얻었고, 특히 어학분야에서는 신동으로 불렸다한다. 15세 때 부모의 정혼으로 첫 번째 결혼을 하고 16세 때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본행을 결심한다. 당시 백남은 상투까지 잘라서 집에도 들어갈 수 없던 형편이었다. 22세에 東京商業高等學校를 졸업하는데 한편으로는 일본의 신극인 小纖桂一郞(소섬계일랑)에 사사(師事)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백남은 졸업 후 귀국하는 즉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의 전신인 수형조합(手形組合)의 副理事로 취직한다. 야간에는 황성기독교(皇城基督校) 전수학관에서 교사 일을 맡았다. 하지만 수형조합에서 일본인들의 득세가 날로 심해지자 거기에서 나오고 만다. 그후 매일신보사에 들어가 기자생활을 하는 하면서 경성학당 동창인 조중환과 1912년 극단 〈문수성〉을 조직하여 원각사에서 최초로 〈불여귀〉를 공연하였으며, 이어서 〈천리마〉,〈장한몽〉,〈나의 죄〉,〈상부변〉등을 공연했으나 경영난으로 1914년 〈문수성〉은 해산되고 만다. 1921년 동경 유학생이 조직한 〈예술좌〉에 자신이 쓴 처녀희곡 〈운명〉을 상영하였고, 1922년에는 〈민중극단〉을 조직하여 제 1회 공연으로 〈등대지기〉, 〈기연〉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1923년 총독부 체신국에서 저축을 장려할 목적의 영화 제작을 위촉받자 이를 승낙하고 〈월화의 맹서〉라는 제목으로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았다. 츨연 배우는 〈민중극단〉의 단원들로 구성하여 경성호텔에서 시사회를 가졌는데 크게 화제가 되어 전국에 순회 상연되었다. 1925년 1월 을지로 5가에 〈윤백남 프로덕션〉이라는 한국인 최초의 영화 회사를 창립하여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발표하였다. 이어 제2회 작품으로 춘원의 〈개척자〉를 채택하였으나 경영난으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프로덕션은 해산되고 만다.
1925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국내최초로〈수호지〉를 완역, 동아일보에 연재(1928.5.1~1930.1.10)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첫 번째 역사소설인 〈대도전〉을 1930년 1월 6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해조곡〉〈추풍령〉〈봉화〉〈흑두건〉〈미수〉〈백련유전기〉〈대호전〉〈회천기〉〈야화〉〈낙조의노래〉〈천추의 한〉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게 된다.
위에서 보듯 윤백남은 초창기 연극과 영화부문에서의 개척자였기에 그에 관한 평가가 소설가로서의 평가보다 더 강조되고 있다. 또한 그의 소설이 가진 통속성은 우리 문단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대도전〉의 작품에 나타난 현실인식중 대중 지향적 문학관과 작품에 나타난 민권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작품의 의의와 한계점에 대해서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윤지경, 「윤백남 역사소설 연구」, 대구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3윤백남, “신문소설의 그 의의와 기교”, 〈조선일보〉, 1933. 5. 14
문철주, 「한국 근대 역사소설 연구」, 동아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
이충희, 「尹白南의 歷史小說 硏究」, 충남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5
박종홍, 「일제 강점기 역사소설 연구」, 경북대 박사학위 논문, 1990
박종홍, 『현대소설탐구』, 영남대학교, 2002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 윤백남의 <대도전> 연구 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