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에찬 여성들 요약
- 최초 등록일
- 2010.09.03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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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성인권에 대한 발달을 알 수 있는 광기에찬 여성들 이라는 글을 요약한 글입니다.
목차
1. 시작하며
2. 첩(妾)
3. 가족관계의 변화
4. 간통쌍벌죄
5. 민중의 힘
6. 글을 마치며
본문내용
많은 사람들은 축첩문제에 대한 변화가 해방과 함께 밀려든 서구화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 1945년 해방의 물결 속에 ‘여성 해방’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신생국가의 헌법에 남녀평등을 선언했다고 해서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선언일 뿐이며 오랫동안 지내온 일상은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헌법의 선언보다 더 중요한 진전은 축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 있었다.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에도 축첩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첩이되는 여성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이들의 화살은 첩을 둔 남성을 대상으로 하게 된다.
그렇지만 처든 첩이든 여성들은 여전히 불안하고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남성들은 여전히 강자였고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축첩이 범죄가 되었어도 여성단체는 이를 일상으로 만들지 못했다. 이를 일상을 바꾼 사람들은 민중으로서의 여성들 자신이었다. 이들의 일상을 바꾼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피난·소개 등의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구를 이동시켰고, 수많은 여성들은 남편의 부재에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이동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여성들의 경험은 가족관계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제 여성들은 축첩이 잘못된 관행임을 깨닫고 있었다. 단지 이를 바로 잡을 힘이 없었을 뿐이었고 결국 여성들이 택한 방법은 축첩과 관련된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 ‘떼 지어’ 다니며 관심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이러한 행위를 ‘광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여성들의 행위는 일상의 삶이며 투쟁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상이 지나면서 한 집에 살던 처와 첩은 서로 떨어져 살게 되었고, 다시 부첩관계는 어두운 공간으로 숨어들어 ‘내연(內緣)관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제 누구든 내연관계가 합법적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