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묘 답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0.08.20
- 최종 저작일
- 2009.06
- 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 본 문서는 한글 2005 이상 버전에서 작성된 문서입니다.
한글 2002 이하 프로그램에서는 열어볼 수 없으니, 한글 뷰어프로그램(한글 2005 이상)을 설치하신 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사육신묘를 답사한 후에 작성한 답사 보고서 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Ⅰ. 사육신공원 알아보기
사육신공원은 계유정란으로 인해 부당하게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 맞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임을 당한 충신 중 이를 주동한 일곱 분의 묘를 모신 곳이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 비를 세웠다. 지금의 사육신묘는 서울시가 의절사, 비각 등을 새로 짓고 1978년 월 19일에 개원되었으며, 공원 내의 묘와 의절사는 서울시 지정 문화재 제 8호로 지정되었다. 의로운 충혼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서울시 동작구청의 자원 하에 사육신 현창회 주관으로 매년 10월 9일에 추모제향을 올리며 충효사상 실천도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死六臣墓’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묘자리는 일곱 개가 있다. 처음에는 단종의 왕위 회복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한 40명의 시신 중에 성승,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어느 스님(김시습 선생이라고 전함)이 지금의 사육신공원에 모셨다고 한다. 당시 육신묘에 모셔진 다섯 분 중에서는 사육신에 꼽히지 않은 성승장군의 묘도 모셔져 있었고, 또 그 숫자도 여섯 분이 아닌데도 사육신묘라고 불려왔다. 그 후 임진란을 거치며 성승장군의 묘가 실전되어 네 분의 묘만이 모셔져 왔지만 이에 관계없이 사육신묘라고 불렸다.
누구를 사육신으로 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 되어오던 중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병오일조에 의거하여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 여섯 분이 세조때 가려진 사육신으로 판정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서울시가 사육신묘역을 성역화하며 하위지·유성원·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추가로 봉안했다. 그러나 기존의 유응부 장군의 묘는 그대로 두고 모시기로 결의하면서 현재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