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페트라에 대해서(붉은 장미의 고대 도시, 요르단 페트라)
- 최초 등록일
- 2009.12.07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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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요르단 페트라에 대해서(붉은 장미의 고대 도시, 요르단 페트라)
완전 A+ 보장 레포트입니다.
목차
1.성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암굴 유적
2.가장 오래된 길 위에 있는 문명
3.페트라 최고 걸작 카즈네
4.길로 흥하고 길로 망한다
본문내용
성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암굴 유적
요르단은 중동국가인데도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면적도 남한 넓이와 비슷한 작은 나라다. 하지만 요르단은 성서의 주요 무대였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가 이 나라를 지나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이자 모세의 형인 아론이 죽은 뒤 묻혔고 모세도 요르단의 느보 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엇보다도 출애굽 40년 가운데 무려 38년 세월을 보냈다는 룸 광야도 이 나라 땅에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5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페트라는 성서에는 ‘셀라’로 적혀있다. 이는 히브리어로 ‘바위’란 뜻이다. 그 뒤 이름이 페트라로 바뀐 것은 두샤라에 정착하여 대상 무역으로 번성을 누리던 나바트 왕국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탐하여 공격한 다음부터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던 그리스계 이집트 왕국으로 나바트족은 외적의 공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샤라에서 페트라로 도읍을 옮긴 것이다.
페트라는 어원대로 바위로 된 도시다. 그것도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제대로 보기 힘든 민둥산 바위다. 온통 붉은색을 띠는 바위로 덮여있어 햇빛에 비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다.
이곳에 도시를 세운 민족은 기원전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온 나바트족이다. 이곳에는 물이 있어 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게다가 비단과 향료의 이동길로도 부르는 대상로도 20여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런 좋은 조건 때문에 나바트 족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