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古無胡人爲天子者
- 최초 등록일
- 2009.10.10
- 최종 저작일
- 2008.03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동양사-自古無胡人爲天子者
목차
제1절 유연의 칭제와 자고무호인위천자자 의의
1. 유연의 칭제과정
2. 호족군주의 출현과 자고무호인위천자자 의식
제2절 후조의 건국과 천왕호
본문내용
1. 유연의 칭제과정
오호시기(오호시기)의 정권은 빈번한 성립과 멸망이 그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듯 국가체제의 정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정비된 체제가 실효를 거두기도 전에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이 빈발했던 것으로써 이는 당시의 군현의 역할이 위축되어 보루(보루)나 오벽(오벽)․부락(부락)등이 사회의 실질적 통치 단위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정권을 건립한 오호제국의 영역은 오보주인(오보주인)이나 부락추장의 지지 획득여부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들 정권과 당시의 할거 군벌세력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 정권의 영도자와 할거세력의 비교를 그들 정권건립의 성공 여부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때 이들 호족추장의 할거세력과는 달리 중국의 황제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재미문의 대 사건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따라 이들의 통치과정에서는 숱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통치 방향은 제권(제권)의 강화, 즉 통치권의 안정에 두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연은 기원전 2세기 전후 중국의 황제지배체제(황제지배체제)는 점차로 성숙하여 전형적 형태를 완비하여 갔으며, 흉노(흉노) 모돈단우(모돈단우) 또한 북아(북아) 유목사회(유목사회)에서 연맹 영수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동한 초년에 발생하였던 흉노의 단우위(단우위) 계승을 위요한 내분은 그들의 남북 분열을 유발시켜 북흉노는 점차로 동아시아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져 갔으며, 남흉노는 한왕조에 신속(신속)하여 계속적으로 중국의 북변(북변)으로 이주하여 왔다.
흉노(흉노) : 흉노세력의 와해 및 한왕조의 신속과 더불어 흉노는 점차로 한의 변방에 거주하는 하나의 부족을 지칭하는 어휘로 변하여 흉노부공이 세운 국가라는 의미는 소실되었다.
단우(단우) : 한의 왕과 같은 의미의 작명(작명)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한천자가 새외(새외)의 군장에게 하사하는 영호(영호)로 변하게 되었다.
고북부도위(고북부도위) 좌현왕(좌현왕) 유선(유선)을 중심으로 하는 부락 귀족들은 정(정)에 주둔한 서진 성도왕 사마영의 막하 부장인 유연을 대단우(대단우)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