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안과 의화단
- 최초 등록일
- 2009.06.0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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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강좌중국사
목차
Ⅰ. 머 리 말
Ⅱ. 19세기 후반의 ‘교안(敎案)’ -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Ⅲ.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Ⅳ. 맺 음 말
본문내용
Ⅰ. 머 리 말
중국근대사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제1차 중영전쟁(中英戰爭) 이후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점이라는 외부적 도전에 대해 청 중기 이래 확대, 심화되어 온 국내의 여러 모순을 배경으로 중국의 역사주체들이 대응해 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중국근대사를 이해하는 또하나의 접근방식으로 주로 구미적 문명사의 입장에서 ‘서구의 충격’과 그에 대한 ‘동아시아의 대응’을 추구하는 흐름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와 선교사를 서구 기독교문명의 대표로 간주한다. 따라서 기독교가 중국에서 야기한 문제는 중국의 관습의 틀이라 할 수 있는 유교와의 충돌에 초점이 모아지게 된다. 반기독교운동에서 유교의 주된 지지계층인 관료와 신사(紳士)가 주목받는 것은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교안과 의화단운동은 교회세력 및 중국 주재 구미 외교당국과 청조의 마찰로 이어졌으며 그 배경에는 불평등조약체제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 처리는 외교교섭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중외관계를 새로이 규정하여 중국근대사의 전개에 대외적 조건을 변화시켜 나갔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이같이 교안과 의화단운동에의 접근방식을 운동사, 문명사 또는 사상사 그리고 외교사로 개괄할 수 있겠지만 기존의 연구성과를 이 글에서 모조리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기왕에 제기된 주요 논점을 그 배경과 전개 및 결과에 따라 적절히 안배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Ⅱ. 19세기 후반의 ‘교안(敎案)’ -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1. 교회세력(敎會勢力)의 확장과 ‘민교(民敎)’ 대립
기독교는 당초(唐初)에 경교(景敎)란 이름으로 전파된 뒤 오랜 전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 전개에 큰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제1차 중영전쟁의 패배로 기독교의 선교가 근대적 형식의 국제조약에 의해 허여된 뒤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의 사정에 비교적 밝았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본국의 대중국정책에 직접․간접으로 연관을 맺었다. 1차 중영전쟁의 처리과정에서 체결된 조약에서는 서영인의 내지여행이 인정되지 않았고 여기에는 선교사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2차 중영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조약에서는 내지선교 등의 기독교 선교의 여러 특권을 얻어냈다. 내지선교의 인정은 기독교세력 확장의 외적 조건일 뿐 아니라 각지에서 선교사 및 중국인 신도<敎民>와 비신도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중국 전역에 걸쳐 지열하게 전개된 반기독교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