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으로 보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반남의 정치상황
- 최초 등록일
- 2009.05.19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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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으로 보는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반남의 정치상황에 대한 글입니다. 관제에 주목하여 반남의 정치상황에 대해 풀어내고자 하였습니다.
참고한 문헌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인터넷 자료는 단 한 글자도 보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이고 믿을 수 있을 만한 문헌만을 선별하여 참고하였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백제의 관제(冠制)와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
2.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의 특징
3.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반남의 정치상황
Ⅲ. 나가는 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필자는 이번 답사를 위해 유물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반남 고분군(潘南 古墳群)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조사 중, 특히 필자의 기억에 남는 것은 신촌리 9호분이었다. 신촌리 9호분은 전남 나주시 반남면에 위치한다. 백제 중심지역(한성, 웅진, 사비)과 떨어져 있는데도 이곳에서 금동관모가 출토된 것이다.
관(冠)에는 士와 庶를 구별하는 기능이 있다. 사와 서의 구별은 사회적 계층화가 일정하게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관제는 이러한 계층화를 보여주는 제도적 장치이다. 따라서 관은 착용자의 지위와 신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노중국, 「백제의 冠制와 그 性格」, 『계명사학 17』, 계명사학회, 2006. p.167.
이 중 금동관모는 그 소유자의 사회, 혹은 정치적 위계를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적 의미 또한 크다. 이남석, 「백제 금동관모출토 무덤의 검토」, 『先史와 古代26』, 韓國古代學會, 2007. p.238.
금동관모 출토 무덤들은 비단 금동관모 외에 위세품으로 판단할 수 있는 고품격의 유물이 동반되고 있음도 주목되는데 대체로 동일지역의 최고급 품격의 것들로 미루어 보아 무덤의 파장자는 최고 수장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_______, 위의 논문. p.219.
박보현(1998)의 견해에 따르면 신촌리 9호분은 백제가 공주(웅진)지역을 수도로 삼고 있었던 시기와 연관이 있다. 박보현, 「금동관으로 본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의 연대」, 『백제연구28』,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8. p.187.
(중략) 그러나 현재까지 분명한 사실은 한강유역의 고분에서 신촌리 9호분에서 볼 수 있는 관, 관식, 자식대도, 식리와 같은 이른 바 위신재적 금공품이 발견된 예가 없기 때문에 신촌리 9호분 을관의 경우는 공주지역을 수도로 삼고 있었던 시기의 지역지배 방법과 관련시키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판단된다.
이후 연구가 계속 되어 최근에는 신촌리 9호분을 구체적으로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전반대의 무덤으로 간주하고, 마한의 전통을 간직한 백제묘로 보고 있다. 이남석, 위의 논문. pp.235~236.
참고 자료
국립광주박물관, 『나주 반남 고분군 종합조사 보고서』, 삼지문화사, 1988.
국립문화재연구소, 『나주 신촌리 9호분』, 2001.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도록(일반용)』, 도서출판 솔, 2005.
국사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인적자원부, 2005.
그 밖에 더 있지만 너무 많아서 여기에 올라가지가 않습니다^^;;
이외의 자료는 본문에 따로 표기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