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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과 졸업논문]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내용입니다.목차
Ⅰ. 서론Ⅱ. 요동 파병 이전 삼국의 관계
1. 후금의 등장
2. 조선의 상황
3. 대후금 정책
Ⅲ. 명의 파병 요청과 요동 파병
1. 명의 파병 요청의 배경
2. 명의 파병 요청에 대한 조선의 선택
3. 명의 파병 요청에 대한 광해군의 파병 반대 이유
Ⅳ. 심하전투와 심하전투 이후 명·청과의 관계
1. 심하전투의 배경과 그 결과
2. 명의 2차 파병 요청과 파병 요청에 대한 광해군의 대응
3. 조선의 요동에 대한 선택
4. 무르익는 요동의 분위기와 조선의 상황
Ⅴ.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조선(朝鮮)은 한족 왕조인 명(明)과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맺어 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은 조선보다 정치·문화적으로 조선보다 우위에 있는 대국으로써 군림해 왔으며, 조선은 명에게 외교적 승인이나 정책에 대해 승인받았으며, 명은 조선 국왕의 지배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러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조선이 명 중심의 ‘중화적 세계질서’를 따르고 유교의 가치를 수용한 것이었다. 이익주 외,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제언과 모색』, 동북아역사재단, 2010, pp.275~276.
14세기부터 이어진 명 중심의 ‘중화적 세계질서’는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요하게 되었다. 왜의 공격은 ‘중화적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당시 명은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다는 구실로 참전하였다.
<중 략>
3. 대후금 정책
광해군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취했던 대응책은 기본적으로 기미책(羈縻策)이라고 할 수 있다. 기(羈)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미(縻)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하는데 ‘기미’란 본래 중국이 흉노와 같은 주변 오랑캐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즉 소극적인 현상 유지 정책이라 할 수 있다.
한명기,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 p.187.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가 아직 복구되지 않았기에 나온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광해군은 건주여진과 적대하기보다는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또 다른 전쟁을 예방하려 했다. 그러나 명을 정복하는 데 있어 조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누르하치는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광해군은 기미책을 통해 당장 후금의 침략을 조선으로 향하는 것을 피하고 국방을 강화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그에 대한 방어 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광해군이 취한 대응책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을 위한 그의 다양한 노력이었다. 후금의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게 밀린 다른 여진족들을 회유하여 정보를 수집하는가 하면, 만주어에 능통한 역관들을 양성하여 후금에 보내는 등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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