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서는 배포용으로 복사 및 편집이 불가합니다.
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동국사학회
ㆍ수록지정보 : 동국사학 / 55권
ㆍ저자명 : 고명수
ㆍ저자명 : 고명수
목차
Ⅰ. 머리말Ⅱ. 쿠빌라이의 儒學·儒士에 대한 인식
Ⅲ. 중앙·지방 관원의 구성과 성격
Ⅳ. 王文統 - 漢人儒士 대립과 쿠빌라이의 입장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한국어 초록
본 논문은 쿠빌라이 집권 초기 관리등용의 양태를 탈중국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종래의 ‘李?의 난 이전 漢人儒士 重用’ 견해를 비판하고, 그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쿠빌라이는 潛邸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한인유사의 높은 지위·권한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한지를 다스리는 유용한 수단으로써 儒學이 보유한 일부 실용성과 정권확립을 위해 필요한 한인유사의 실용적 지식·재능만 중요시하고, 유학의 본질적 이념·가치와 한인유사의 유학적 소양, 학문수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실무능력을 결여한 대부분의 한인유사를 일관되게 불신·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한인유사의 정치·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은 몽골시대 사회계층 안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다.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쿠빌라이의 人才觀은 집권 초기 중앙·지방관청에 관리를 등용하는 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우선 몽골의 전통적 귀족가문과 비몽골계 공신가문 출신 인물을 최고위직에 임명하여 그들의 우월한 지위·권한을 보장했다. 그리고 오로지 실무적 경험·지식·재능만을 평가하여 漢人文士를 그 아래 직책에 기용했다. 한인관원의 수는 비 한인에 비해 현저하게 많지 않았고, 비록 그들 대부분이 유학을 깊이 탐구한 지식인이었지만, 관리등용 후 정치일선에서 유학적 이념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儒士’의 면모를 드러낸 인물은 소수에 불과했다.
쿠빌라이의 관리등용 성향은 王文統에 대한 두터운 신임·중용에서 잘 드러난다. 신정부 출범 직후 燕京行省 平章政事에 임명된 왕문통은 탁월한 재정운용 능력을 발휘하여 정권의 기초확립에 공헌한 전형적인 실무관료였다. 일부 정통 한인유사(眞儒)들이 유학적 이념을 내세워 그의 정치를 비판했지만, 쿠빌라이는 그의 비범한 재능을 귀하게 여겨 반대세력의 공세 속에서 그를 적극 비호하고, 정통 한인유사를 고위관직에 임명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관리등용 성향은 이단의 난 후 재무관료 아흐마드를 중용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므로 집권 초기 쿠빌라이가 漢化 경향에 입각하여 한인유사를 중용하고, 이단의 난을 계기로 그의 관리등용 방침이 획기적으로 변했다는 종래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히려 그가 잠저시기부터 치세 말기까지 줄곧 유능한 실무관료를 중시하고, 실무능력을 결여한 한인유사를 불신하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보는 편이 온당하다. 따라서 이단의 난 전후 쿠빌라이 관리등용의 성격은 ‘변화’가 아닌 ‘지속’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영어 초록
Khubilai emphasized two parts of Confucianism: First thing is practicality of Confucianism as a useful tool to rule Chinese area(漢地) and second are necessary practical knowledge and talents of Chinese scholars(漢人儒士) in order to establishment of his regime. He was not interested in the essential ideology and values of Confucianism, the Chinese scholars’ Confucian refinement and academic level. Therefore, he didn’t appoint Chinese scholars to the officials at the central and provincial government offices at the early era of his rule. The number of Chinese scholars in the government officials was not more than those who are non-Chinese officials, and even though most of them were intellectuals who had studied Confucianism in-depth, there were only a few them who revealed the aspect of a typical ‘Confucian scholar’ putting Confucian ideas into practice in the political fields afterwards. He trusted strongly and employed Wang Wen Tong(王文統) who is a capable government official in charge. Some Chinese scholars criticized his politics for the sake of Confucian ideology, but Khubilai actively protected him from his opponents’ attack. This tendency of the way of his assignment to government officials continued when appointing Ahmad to a financial official after Li-Tan(李?)’s rebellion. Accordingly, the nature of Khubilai’s assignment to government officials before and after Li-Tan’s rebellion should be newly understood as ‘continuance,’ not as ‘change.’참고 자료
없음"동국사학"의 다른 논문
- 『舊唐書』ㆍ『新唐書』 程務挺傳 譯註16페이지
- 『舊唐書』ㆍ『新唐書』 穆寧傳 譯註17페이지
- NCF의 성립과 성격39페이지
- 정치국에서 크렘린 집무실까지35페이지
- 제르미날법과 프랑스 제약업의 초기 산업화(1860년대~1910년대)35페이지
- 서양 고중세시대의 평화 이념과 실제36페이지
- 淸末 ‘韓淸境界地域’ 行政體制 構築과 韓人 管理43페이지
- 唐末 黃晟의 明州 관할과 寺院45페이지
- 靑銅器 銘文의 商에서 西周 樣式의로의 변화31페이지
- 대한민국 중등학생들의 미국 국가이미지에 대한 설문조사 분석3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