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조 문학 분석
- 최초 등록일
- 2008.05.1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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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난 학기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로 작성하여 A+을 받은 보고서입니다.
목차
1. 이청조의 삶과 문학
2. 전통적 유교사회 속 이청조의 사(詞)
3. 송사의 특징과 형식 및 발전양상
4. 이청조의 사(詞) 분석
5. 이청조 문학의 특징
6. 작품분석을 통해 본 시대변천 과정 고찰
7. 맺음말
8. 참고자료
본문내용
이청조는 송(宋) 시대에 태어났다. 이때는 상업과 기술, 그리고 예술이 번성했는데 사회적인 변화도 극심한 시절이었다. 그녀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가 명확치 않아서 문헌마다 태어난 해는 1081-1084, 죽은 해는 1141-1155로 추정한다. 1084년 이 해는 송나라 원풍 7년에 해당한다. 호는 이안거사. `이(易)`자는 우리나라 말로 `쉬울 이`라고도 읽고 `바꿀 역`이라고도 읽어 국내 문헌 중에는 `역안거사`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이안거사`이다. 태어난 곳은 중국 산동성 제남이다. 제남의 옛 지명은 역성이었다. 아버지는 이격비인데 호가 문숙이었다. 예부시랑이라는 고위 관직에 있었고, 시와 문에 능한 이름있는 작가였다. 그는 소식(蘇軾)과도 교류가 있었고 그의 작품 "낙양명원기"는 소식의 극찬을 받았다. 어머니도 문명이 뛰어난 집안 출생으로 왕공진이라는 사람의 손녀였는데, 어머니 역시 시문에 능했다.
이청조는 이런 부귀하고 문명 있는 집안 배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시문을 배웠고 천부적 재질이 있어 11세 이전에 이미 시를 지었다. 이런 배경과 재질이 그녀를 중국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이 되게 만든 것이었다. 그녀는 18세-21세로 추정되는 시기에 조명성과 결혼했다. 대개 이청조가 18세, 조명성이 21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명성의 아버지는 이부시랑 조정지였고 산동성 청주에 본가를 두고 있었다. 당시 관직 때문에 송의 수도였던 개봉(開封)에 살고 있었다. 명성은 조정지의 둘째아들이었고 태학의 학생이었다. 명성과 청조 두 사람이 결혼한 후의 생활은 윤택하고 평안했다. 둘다 책과 글 짓는 것을 좋아해서 침식을 잊을 정도로 즐겼다. 그들은 옛 서적, 그림, 글씨 등의 골동품을 열심히 모았다. 그 시절에 이청조는 스스로를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안거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조는 신혼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향기로운 시들을 썼다. 얼마 후, 당시 아직 학생이었던 명성이 다른 곳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는데 이때 청조는 유명한 상사의 사(詞)를 남겼다. 결혼 2년째 되는 해에 명성은 관직에 나갔고 시아버지 정지는 재상이 되었다. 결혼 6년째, 그녀가 24세가 되었을 때 시아버지 정지가 죽어서 그들은 청주로 돌아왔다. 청주에서 약 10년 동안 계속 골동품들을 모았고, 30권의 방대한 "금석문"을 펴냈다. 1126년, 청조가 43세 되던 해에 명성은 치주의 태수였다. 금(金, 여진족)이 송나라를 침략하여 개봉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건강(建康; 현재의 강소성 남경)으로 피난했다. 명성은 청조가 46세 때 병에 걸려 죽었고,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청조는 혼자 살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도 잃고 그 동안 모아놓은 수집품들도 없어졌기 때문에 큰 슬픔을 느꼈다. 이후로 그녀는 자신의 슬픈 삶과 국난에 대한 많은 시를 썼다.
참고 자료
정범진, 중국문학사, 학연사
천이두, 중국 여성의 성과 예술, 일월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