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정치사상사연구(마루야마 마사오 저)
- 최초 등록일
- 2007.07.30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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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第 1 章 근세 일본유교의 발전에 있어서 소라이가쿠(珇徠學)의 특질 및 국학(國學)과의 관련성
第 2 章 근세 일본정치사상에 있어서의 “자연(自然)”과 “작위(作爲)”
第 3 章 국민주의(國民主義)의 “전기적(前期的)” 형성
본문내용
중국의 사회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가부장의 절대적 권위 하에 통솔되는 폐쇄적인 가족사회가 모든 사회관계의 기본 단위가 되고, 국가질서도 그 기반 위에 계층적으로 구성되며 그 정점에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가진 전제군주가 위치하는 형태를 나타낸다. 왕조가 빈번하게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가 특이한 변화 없이 늘 같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에 깊이 뿌리내린 유교적 단합에 기인한다. 유교는 전국(戰國)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논쟁 속에서 점차 그 체계를 갖추면서 전한(前漢)에 이르러 통일적인 국가질서가 확립됨과 동시에 관학으로서의 배타적인 지위를 차지했는데, 삼강오륜으로 대표되는 제반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하존비(上下尊卑)의 엄격한 구분을 주장함으로써 전제적 정치구조에 가장 적합한 사상체계였다. 즉, 그러한 이유로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계없이 언제나 새 왕조에 의해 국교(國敎)적인 권위를 보증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유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백제의 왕인이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가지고 왔을 때부터라고 한다. 유교의 특성은 중국의 특성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지만 진정한 사상이며 피상적인 행동지침 수준의 논의가 아니기에 다른 나라인 일본에 수용될 수 있었다. 사상을 낳은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깊이 반영된 사상의 경우, 다른 사회에 적용될 때 현저한 추상화가 발생되는데 이 추상화 수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일본에 끼친 유교의 영향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 존재하지만, 그들조차도 유교의 전성기였던 도쿠가와(德川) 시대에 대해서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전국(戰國) 시대에 형성된 근세 봉건사회에서 사무라이(武士)는 철포(鐵砲)의 전래로 인해 토지와의 직접적인 관련을 잃게 되자 가신단(家臣團)을 형성하여 영주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때의 세분화된 신분체계는 중국에서의 유교 형성시기와 유형적으로 비슷했기 때문에 모든 사회관계를 이데올로기적인 유교윤리로써 설명하기에 매우 적절한 상태였다. 뿐만아니라 영주와 사무라이 간의 인정(人情), 서약(誓約) 등이 퇴색해 사회 통제의 사상적 수단으로서 단순한 정서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선, 객관적인 윤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마루야마마사오,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