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교동고분군
- 최초 등록일
- 2007.07.05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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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녕 교동고분군 리포트입니다~
목차
1.머리말
2.창녕군의 역사적 변천
3.창녕 교동고분군의 지리적 위치
4.창녕 교동 고분군의 발굴
5. 창녕 교동고분군의 출토유물
6.출토 유물로 본 당시의 생활
7.창녕 교동 고분의 특색
8.맺음말
본문내용
4.창녕 교동 고분군의 발굴
창녕읍 동쪽 목마산 부근 송현리 구릉에서 북쪽 교리에 걸쳐 있는 가야 무덤들로, 1918년 일본사람들이 일부 발굴하여 보고서도 없고 유물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발굴유물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옮겨가고 일부만 국내에 남아있다. 일본으로 옮겨간 유물의 일부분이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가야유물 가운데 출토지가 창녕으로 확인된 것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금동관, 금동제 관모(冠帽), 금은장식 환두대도(環頭大刀)처럼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지배자를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등이 있다.1993년에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목마산 기슭 무덤 5기를 발굴조사 하였다.
내부시설은 모두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1호와 4호에는 추가하여 주검을 매장한 흔적이 있고 1호와 3호 무덤에서는 딸려묻기(순장)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유물은 여러 토기류와 금·은제 장신구, 무기류, 마구류 및 철제 농기구 등이 출토되었다.
무덤의 형태와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만들어진 창녕지역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여 지며, 출토 유물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토기이며 창녕 현지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기형은 이미 경주 계통의 것을 모방하고 있으며, 금제 태환 귀걸이, 삼엽형 장식이 달린 은제허리띠 조각과 같은 장신구는 신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토기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어 5세기경에 창녕지역이 신라 영역권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이미 비화가야(비사벌국)는 신라와 깊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6, 7, 8, 10, 12, 21, 31호분과 송현동의 89, 91호분이 발굴되었을 때에 마차 20대, 화차 2량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그 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유물의 일부도 행방이 애매하게 되었다. 7호분의 적색안료의 경우 고대 벽화나 단청 등에서 사용되는 안료로 확인되기도 했다. 동 고분에서 검출된 인골분석에서는 40대, 30대, 20대 후반의 남녀로서, 남성의 평균신장은 162.4(+2)㎝, 여성은 154㎝ 내외의 신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관은 국보 제138호로 지정돼 호암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같은 해인 1918년에 교동 21호, 31호분이 별도로 발굴되고 그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것이 당시의 교동고분군에 대한 유일한 조사기록으로 남아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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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 푸른역사 『미완의 문명 7백년가야사』200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