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와 흥선대원군 - 비교, 바로알기
- 최초 등록일
- 2006.12.09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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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태후와 흥선대원군을 비교하고 그들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사하여 서술하고 평가하였습니다.
목차
서태후(西太后 ; 1835~1908)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애호나라 집안의 처녀
권자의 배후 ㅡ 수렴청정
봉건 청 왕조의 수호자 서태후
의화단 운동을 이용하다
환관 통치와 서태후
부녀자가 국사에 참여함은 본조(本朝)의 법도에 어긋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흥선대원군 집권 과정
흥선대원군 정치의 장점
흥선대원군 정치의 단점
실권(失權) 이후 흥선대원군의 정치행로
결론
본문내용
서태후(西太后 ; 1835~1908)
서태후는 청나라 제 10대 임금 목종(穆宗) 동치제(同治帝)와 제 11대 덕종(德宗) 광서제(光緖帝) 대신 수렴 청정을 하여 태평천국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의 수십 년간 중국 천하를 지배했다. 이 기간은 중국이 나라 운이 다해가던 시기로 외세 침입에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서태후는 중국 왕조를 끝까지 지켜내고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고자 애를 썼지만 중국의 역사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애호나라 집안의 처녀
청나라는 중국의 본토 민족인 한족이 아니라 이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족의 엽혁나라(애호나라) 집안 혜징(惠澂)의 딸 옥란(玉蘭)은, 3년 마다 만주족 여자들 가운데 여러 모르 탁월한 여자를 뽑아 입궁시키는 제도에 의해 궁으로 들어왔다.
옥란은 절세 가인에다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특히 노래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는 열 여섯 살에 5경(經)을 암송하고 24사(史)를 독파했다. 입궁한 수많은 처녀들은 황제의 눈에 들지 않으면 평생 궁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옥란은 이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를 지켜줄 뿐이라는 생각으로 학습에 전념하는 한편, 문종 함풍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황제를 모시는 태감(환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황제가 자주 지나가는 길목을 알아두었다. 그는 매일 황제가 지나가는 곳에 지켜 섰다가 우연인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노래를 불러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참고 자료
박석분 지음, 『역사를 만든 20인 세게 여성들』(새날, 2000)
이이화 지음,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 열강』(한길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