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물]원효대사
- 최초 등록일
- 2006.07.17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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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효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며 목차에 따른 전개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차
1.배경
(1)골품제
(2)전쟁
2.사상
(1)일심
(2)화쟁
(3)무애
3.저술
(1)금강삼매경론
(2)대승기신론소
(3)십문화쟁론
4.외국에서의 원효에 대한 평가
(1)중국
(2)일본
5.평가
본문내용
1. 시대적 배경
(1)골품제
신라 사회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었다. 골품제는 8등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骨制)와 일반귀족과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두품제(頭品制)가 있다. 골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로 나뉘어지는데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은 성골, 성골이 모두 없어질 경우 왕위에 올라도 될만큼의 세력을 갖춘 대군장 출신에게는 진골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두품제는 6두품에서 아래로 1두품까지 있었는데 6두품에서 4두품까지는 일반귀족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신분층이었다. 1~3두품도 명칭은 있었으나 이들은 관직에는 오를 수 없는 일반 평민과 천민이었고 나중에 자연히 소멸된다. 7세기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신라의 영토가 축소되자 골품제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설계두의 일화를 보면 6두품 집안의 자손인 설계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우리나라는 사람을 쓰는데 먼저 골품을 따진다.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크게 될 수 없다.’ 고 하여 621년 당나라로 건너가 고구려와의 전투중에 전사한다. 골품제의 변화는 왕실의 교체모습에도 나타난다 진평왕이 죽고난 뒤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녀가 맏딸이기 때문에 혈통상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진흥왕이나 진평왕 같이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무리였다. 여왕이 죽은 후 김춘추가 알천의 추천을 받아 왕위를 잇게 되는데 이는 종래의 왕위계승원칙인 혈연을 우선으로 하는 것과 혈연조건이 같다면 연장자가 우선이라는 원칙을 깨는 것이었다.
(2)전쟁
신라는 5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와 함께 백제, 가야, 왜와 대립하였고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6세기 중반이후는 한 나라를 두 나라가 공격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공격당하는 추세였다. 전쟁이 일상화 하는 것에 비례하여 폐해도 더욱 커져갔다.
참고 자료
원효탐색 - 고영섭
영원한 새벽 원효 - 금장태
역사로 읽는 원효 - 김상현
원효의 생애와 사상 - 황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