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건축가 김수근
- 최초 등록일
- 2006.06.06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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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벽돌의빛 "김수근"에대한 비디오 감상문이며
건축가 김수근에 대한 서평입니다.
목차
김수근에 대한 이력
김수근이 살아온 길
김수근이 남긴 작품과 의의
(문서내 구분없음)
본문내용
1986년 6월 14일 56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간 그는 3차원의 언어로 시를 썼다.
사람들이 말하는 김수근이란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인으로 그는 [공간사옥]을 만들어낸 현대건축의 거장이었다.
그는 6.25때 건축공부를 위해 1951년부터 1960년까지 문화예술의 황금기였던 일본으로 밀항하여 동경예술 대학에 진학하였다. 1958년 일본인과 결혼하였고 1960년대 국회의사당 공모전의 당선으로 갑작스런 귀국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젊은 신참건축가가 당선된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안타깝게도 5.16쿠데타로 무산되고 그시기에 김종필과의 만남을 계기로 [타워호텔]과 기념건축인 [자유센터]와 같은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면서 김수근의 시대가 시작된다.
수완이 좋고 리더쉽이 강한 젊고 유망한 건축가 김수근은 [부여박물관]논쟁(1968년8월)에 휘말리게 된다. [부여 박물관]의 논쟁은 일본신사의 모양과 같다는 이유에서 시작되었는데 민족감정 때문에 생긴 논란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에 대해 정인하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의 모방은 필연적 상황이다. 그 대상이 일본의 신사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민족감정 때문에 생긴 논란인 것 같다.”
이 논란을 겪으면서 김수근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적이란 무엇인가’ 결국 이 물음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당시의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던 최순우를 통해 우리문화에 눈뜨게 된다.
그는 한옥에 살면서 한동안 [부석사]와 [연경당] 두 개의 건축물에 매달려 살았다.
부석사의 자꾸 따라가게 만들어진 진입로와 연경당의 독특한 공간구성에 매력을 느끼고 한옥이 모여 있는 마을을 보며 모여 있는 것의 미학을 느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