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바흐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06.05.13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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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흐에 대해 조사해 봤습니다.
도움이 되시길...
목차
가문
생애
작풍
본문내용
17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이마르궁정악단에 싫증을 느끼게 된 바흐는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1720년에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 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ꡐ교회음악의 시대ꡑ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오후,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별세, 성 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작풍]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 헬벨의 오르간음악의 작법을 습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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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