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학대]노근리 양민 학대 사건
- 최초 등록일
- 2005.11.18
- 최종 저작일
- 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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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사회와 민족 문화라는 과목을 들으며서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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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50년7월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발생한 미군의 양민 학살 사건은 지난 1998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1999년 9월에 한미 공동으로 구성된 팀이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그 일부 사실을 인정하는 등, 한국 사회 전반에 미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파장을 끼쳤던 사건입니다.
(사진자료 제시, 언론 보도 인용)
생존자에게 사건 당시 상황을 들어보면.
1950년 7월25일 영동군 영동읍 임계리와 주곡리에 지프를 타고 나타난 2명의 미군과 한국경찰관 1명은 주민들에게 급히 짐을 꾸릴 것을 지시했다. 500여명의 주민은 『인민군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대구와 부산으로 피신시켜 주겠다』는 미군의 말을 믿고 그들의 인솔하에 서울_부산 국도를 따라 도보로 피란길에 올랐다. 생존자인 양해찬(梁海燦59)씨는 『25일 밤 하기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미군들은 주민들을 거칠게 길 아래로 끌어내리며 숙영할 것을 명령했다』며 『심상치 않은 미군의 태도에 겁에 질린 주민들은 뜬눈으로 날밤을 샜지만 다음날 미군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고 전했다. 26일 아침 인솔자를 잃은 주민들은 스스로 피란길에 올랐다. 미군이 다시 나타난 것은 이날 정오께. 노근리 철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4,5명의 미군이 피란행렬을 막아서면서 어디론가 무전을 하더군요. 미군들이 긴급히 철수하더니 곧바로 미군전투기가 날아와 기관총을 쏴댔습니다. 현장은 바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습니다』 공중에서의 기총소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길 양쪽에서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피란민중 상당수가 그대로 철로위에 쓰러졌다. 양씨는 『나머지 주민은 미군의 위협속에 철도 밑 굴다리로 대피했다』며 『곧이어 굴다리 양쪽 입구에서 또다시 기총소사가 시작됐다』고 끔찍했던 순간을 되새겼다. 미군들은 굴다리 인근 야산에 기관단총을 걸어놓고 터널 안쪽은 물론이고 대피하기 위해 뛰쳐나온 피란민들에게 무차별로 총탄을 퍼부었다.
라고 증언한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당시 미군의 편지와 증언, 군사 기록들이 시민단체와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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