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답사 기행문
- 최초 등록일
- 2005.05.21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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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받은 자료입니다....잘들 보세요~
목차
1.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과 현황
2. 답사내용
- 답사 동기
- 어떻게 갔는가?
- 세부적인 답사내용
3. 답사하고 난 후 느낀점
본문내용
1. 답사지의 역사적 배경과 현황
망우리 고개는 서울시 중랑구 망우1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1394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놓은 조선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을 물색하게 했다. 양주 검암산 기슭, 지금의 동구릉(東九陵) 내 건원릉(健元陵) 자리에 신후지지(身後之地, 사후에 자신이 묻힐 명당)를 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고개에 이르러 멀리 자기의 능터를 굽어보던 태조가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 했다 하여 이 고개를 망우(忘憂, 근심을 잊음) 고개, 또는 망우리 고개라 불렀다. 옛날 태조가 넘던 고개가 있는 망우산이 오늘날 묘지공원이 되었으니 예언이나 한 듯하다. 현재의 망우리 고개는 옛 고개 남쪽에 새로 낸 길로서, 옛 고개는 지금 중앙선 망우역과 도농역 사이의 기차터널 윗길이었다고 한다.
망우동에는 예부터 자연부락이 많았는데, 그 중 양원리(養源里 또는 良源里)라는 마을은 망우리 고개 이름이 생기게 된 전설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묘자리를 정한 태조 이성계가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를 넘다가 목이 말라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우물을 양원수, 마을 이름을 양원리라 했다. 주택이 늘어나면서 수질이 나빠져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된 양원리 우물은 마을 논 가운데 자취만 남아 있어 세월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중앙선 북쪽 송곡여중.고 뒤에 있는 양원리 마을은 20대를 내려오는 동래 정씨가 6백여년 전부터 살고 있는 집성촌으로 유명하다.
망우리 고개는 역사의 숱한 애환을 안고 있다. 태조의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장지인 금곡까지 갈 때도 이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고종 19년(1882) 6월 9일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가 이 고개를 넘어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봉록미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인들이 민비를 시해하려고 창덕궁으로 몰려들었을 때, 민비는 상궁복을 입고 상궁 가마에 올라 대궐을 빠져 나와 동대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난을 피했다. 광나루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가진 돈이 없자 민비가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 주어 배삯을 대신했다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