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 최초 등록일
- 2004.12.17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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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국민당의 개진과 소련의 중국혁명에의 접근
Ⅲ. 국민당의 개조와 국민혁명의 전개
1. 국민당일전대회의 개최와 국공합작의 성립
2. 상단사건과 국민회의운동
3. 5.30사건과 민중운동
Ⅳ. 국민정부의 성립과 왕장련합체제
Ⅴ. 북벌과 무한국민정부
Ⅵ. 마치며
본문내용
1916년 6월 원세개가 죽자 중화혁명당을 거느린 손문은 약법체제의 회복을 내걸고 원세개 사후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서남군벌의 세력관계를 이용하여 1917년 9월 제 1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같은 손문의 군벌과의 타협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토원운동이래 계속된 것이었다. 이 시기 손문 및 국민당지도자의 사상적 지향에는 5․4운동을 통한 대중운동에 대한 자각, 유물사관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이론의 수용, 일본제국주의와 북경의 군벌에 대한 비판, 직접 민주주의 채용, 그리고 중국의 주체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세계열강들의 자본과 기술의 도움을 받는 기간산업을 국영화하는 방향에서의 '부원의 개발'등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었다. 손문은 1921년 4월 정식으로 제2차 광동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같은 사태진전에 발맞춰 1920년 총장을 개정하고 당조직을 구체화하는 당무를 개편하기도 하였다. 손문은 무엇보다 일차적인 목표를 광동군정부를 근거로 광동을 혁명기지화해서 북벌, 즉 당시 북경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패부 중심의 직예파군벌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손문이 북방의 정치정세에 대응해 1922년 제1차 봉직전쟁에 호응하여 북벌에 나선다. 하지만 진형명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그의 반란으로 손문은 혁명근거지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후 상해에 도착한 손문은 곧바로 당세를 확장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예상하면서 개진에 착수하였다. 손문은 9월에 53명의 '재상해각성동지'를 모아 당부개진을 위한 좌담회를 열고 개진계획을 확정하였고 이어 9월에는 9인의 장정기초위원이 지명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