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제주 43사건
- 최초 등록일
- 2004.11.25
- 최종 저작일
- 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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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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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 제주 43사건의 정의
본론 - 제주 43사건의 내용
결론 - 제주 43사건의 평가
본문내용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경찰· 서청 서북청년단의 약칭. 서북청년단은 북한에서의 사회개혁 당시 식민지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상실하여 남하한 세력들이 서울에서 결성한 극우반공단체였다.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ㆍ단정 5·ㆍ10선거. 남한에서 이루어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단독선거.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武裝蜂起)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武裝隊)와 토벌대(討伐隊)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鎭壓)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2003 , p536
이것은 정부가 2003년 10월 15일에 발표한 제주 4·3사건의 첫 공식 보고서인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나타난 내용이다. 무장대의 경찰지서 습격으로 이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제주 4ㆍ3사건을 무장봉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부차원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 미국 측 관련 문서 입수 실패 등으로 인해 이 사건은 다른 역사적 사건보다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의 수립을 목적으로 남로당(南勞黨)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폭동이라는 폭동론(暴動論), 권력쟁탈을 위해 좌익 세력이 우익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반란론(反亂論), 단순한 민중 수난의 역사로 보는 사태론(事態論), 반제국주의 무장투쟁이라는 인민무장투쟁론(人民武裝鬪爭論), 민중이 주체가 되어 제국주의에 저항한 방어적 항쟁이자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자주항쟁이었다는 민중항쟁론(民衆抗爭論) 등이 있음. 이어지는 글에서는 제주 4ㆍ3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2003
이영권, 『제주역사기행』, 한겨례신문사, 2004
제주 4.3연구소, 『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역사비평사, 200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한려수도와 제주도』, 돌베게, 2003
양한권, 「제주도 4ㆍ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제주도연구』 5권, 제주학회, 1988